한국의 역사문화유적

[스크랩] 고구려,백제예술,문화

홍미인 2014. 5. 28. 13:20

고구려미술 高句麗美術

 

고구려 시대에 발달한 미술의 총칭.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 걸쳐 이루어진 고구려 미술은 퉁구스직계의 북방 기마 유목 민족의 기풍에 한(漢)·위(魏)·진(晉)의 중국 문화를 흡수하였으며, 묘식(墓飾) 예술이나 불교 미술 등은 백제·신라·일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회화]

삼국 중에서도 가장 일찍부터 발전된 고구려의 그림은 한대(漢代)와 육조시대(六朝時代) 및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역 회화(西域繪畵)의 영향을 받아 율동적인 고구려 특유의 회화를 이룩하고, 신라와 백제는 물론 일본 회화의 발달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고구려 회화는 퉁거우〔通溝〕와 평양부근의 여러 지역에 있는 60여 기의 고분 벽화를 통하여 알 수 있는데, 초기에 해당하는 4·5세기의 것은 대체로 묘주(墓主)의 초상이 위주가 되고 불교적인 요소와 풍속화적인 요소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 357년(고국원왕 26)의 묵서명(墨書銘)이 있는 안악(安岳) 3호분과 408년(광개토왕 18)의 연기(年記)를 지닌 덕흥리고분(德興里古墳)을 들 수 있다. 안악 3호분 묘주의 초상화는 묘주 자신의 앉음새는 물론, 그 좌우의 시중꾼들도 모두 삼각형의 구도 속에 들어가 있어 초보적인 요철법(凹凸法) 또는 태서법(泰西法)의 음영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특색은 덕홍리 고분의 벽화에도 잘 나타나 있는데, 이는 고구려 회화가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중기인 6세기경부터는 동적(動的)이고 힘에 넘치는 고구려 회화의 특징이 특히 두드러지게 된다. 6세기경에 축조된 것으로 추축되는 무용총(舞踊塚)의 《수렵도(狩獵圖)》에는 활을 겨누며 말을 달리는 기마인물들이나 사력을 다해 달아나는 산짐승들이 모두 힘찬 운동감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굵고 가는 물결 모양의 선만으로 이루어진 상징적인 산들조차도 그림 전체의 울동에 맞추듯 그려져 있어 한층 힘찬 느낌을 준다.

또한 6세기의 고분 벽화 벽면에는 주인공의 생활모습이나 주인공이 겪은 중요한 일 등이 서사적(敍事的)으로 표현되어 기록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반면에, 천정부분에는 해와 달·별 등 주인공의 영혼이 승천할 천상(天上)의 세계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 보편적 특징이다. 《수렵도》에서 볼 수 있는 고구려적인 회화의 특색은 6세기 말부터 7세기 전반에 이르러 더욱 뚜렷이 나타나 퉁거우의 사신총(四神塚), 중학군(中和郡) 진파리(眞坡里) 1호분 등의 후기 고분벽화에서 가장 전형적으로 엿볼 수 있다. 이들 벽화는 전에 비해 동적인 모습을 훨씬 더 두드러지게 보여 준다. 전대에 비하여 대체로 구성이나 묘사법이 더욱 합리적이고 색채는 훨씬 선명하며, 산수화적인 요소도 좀더 사실적인 모습을 띤다. 그러나 이 시기의 벽화에서는 기록적인 성격의 인물학나 풍족학가 자취를 감추고 그 대신 도교(道敎)의 영향을 받아 사신(四神)이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쳐 그 이전 벽화의 내용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고구려는 이처럼 의례미술의 영향을 받아 수용하면서도 활력에 넘치는 독자적 화풍을 형성하였을 뿐 아니라 일본의 회화 발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일본에 남아 있는 기록에 의하면 일본에 영향을 미친 고구려 출신 화가는 61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호류사〔法隆寺〕의 벽화를 그린 담징(曇徵)과 《천수국만다라수장(天壽國曼茶羅繡帳)》의 밑그림을 그린 가서일(加西逸)및 고려학사(高麗書師) 자마려(子麻呂) 등이다.

[조각]

<불상>

불교 전래 초기의 불상표현으로는, 옛고구려의 도읍인 지안〔輯安〕의 장천(長川)1호분 벽화에서 5세기경에 만들어진 불상및 보살상의 표현이 발견되었다. 한반도에서 발견된 금동불상 중에서 가장 오래된 서울 뚝섬출토의 금동여래좌상(金銅如來坐像)은 5세기 전반경 중국 북위(北魏)의 불상으로 추측되고 있어, 5세기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 가는 고구려불상은 아직 알려진 예가 없는 실정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불상 중 고구려의 것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연가 7년 기미년명금동여레입상(延嘉七年巳未年銘金銅如來立像)이다. 이 불상은 명문에 의해 고구려 때 평양의 동사(東寺)에서 만든 천불상(千佛像) 가운데 하나임을 알 수 있고, 연가(延嘉)는 역사기록에 보이지 않는 연호이나 기미년(己未年)은 양식상으로 보아 539년에 해당된다. 중국 북위나 동위(東魏) 초기의 불상양식을 본따서 약간 거칠기는 하나 강직한 고구려적 표현감각을 가지고 있다.

6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불상 중에는 황해북도 곡산(谷山)출토의 신묘명금동불입상(辛卯銘金銅佛立像)이 있는데, 이 불상은 양식적으로 보아 571년경으론 추측되며 특히 명문(銘文)에 무량수불(無量壽佛), 즉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의 불상 중에는 또한 평양 부근 원오리(元五里) 옛 절터에서 출토된, 흙으로 만들어 구운 이조불보살상군(泥造佛菩薩像群)을 들 수 있다. 이들 불상이나 보살상들은 모두 일정한 틀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상(像)의 형태나 옷주름 등은 부드러운 조형감각을 보여 주고 있으며 양식적으로는 6세기 후반경의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삼국시대에는 반가사유상(半跏思惟椎像)이 유행하였는데 고구려시대의 금동반가사유상(金銅半跏思惟像)이 평양시 평천구역(平川區域) 평천동(平川洞)에서 출토되어 주목된다. 이 상은 양식적으로는 동위양식을 따른 것으로 반가사유상으로는 비교적 초기에 속하는 것이며 국보 83호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은 이 평천리상(像) 비슷한 양식이 좀더 발전된 것이다. 고구려는 중국의 불상양식을 삼국 중 가장 먼저 수용했기 때문에 백제나 신라 두 나라의 불교조각 발전에도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도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와당>

파와(巴瓦)와 평와(平瓦)의 2종이 있다. 파와에는 연꽃무늬·인동(忍冬)무늬·짐승무늬·당초(唐草)무늬·폭선(輻線)무늬·중권(重圈)무늬 등이 많이 이용되었으며, 장군총(將軍塚)에서 나온 것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평와에는 방격(方格)무늬·사격(斜格)무늬·우상(羽狀)무늬·망대(網薰)무늬 등 기하학적인 무늬를 새겼다. 동진(東晉)의 영항을 받은 고구려 기와는 고유의 특질을 발전시켜 직선적·남성적으로 웅장하고 화려하며 견실·강전항을 특징으로 하고 있어, 백제·신라의 기와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주로 국내성(國內城) 및 평양 부근에서 발견된다.

<건축>

통나무·풀·짚 등의 소박한 자재(資材)와 원시적인 기법으로 만들어진 목조건축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궁궐·사찰·관아 및 귀족들의 주택에서는 나무를 깎고 다듬어 촉·홈·이음새 등을 만들고, 여기에 각 부재를 짜맞춘 후 기와로 지붕을 잇는 매우 발달된 건축기법이 사용되었다. 이와 같은 건축양식은 근세까지 지어진 전통적 목조건축의 기본이 되었다. 한편 목조건축 외에 고구려에도 석조건축이 있있으리라고 추측되나 뚜렷한 자료는 없다. 벽화고분 중 당시의 건물을 그린 건축도에는 성곽을 그린 성곽도와 주택을 그린 전각도(殿閣圖) 및 주택의 부속건물인 부엌이나 창고 또는 마구간 등을 그린 주택의 부속건물도가 있다.

성곽도에는 삼실총(三室塚)의 경우와 같이 병사들이 성을 공격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속에 성곽의 일부가 그려진 것이 있고, 요동성총(遼東城塚)·약수리벽화분(藥水里壁畵)과 같이 성곽 전체를 높은 위치에서 조감한 그림이 있다. 전각도는 쌍영총(雙楹塚)·천왕지신총(天王地神塚)·대안리(大安里) 1호분·팔천리(捌川里) 벽화분·퉁거우〔通溝〕1호분·안악1호분 등에서 볼 수 있다.

쌍영총의 전각도는 맞배지붕의 기와집이 그려져 있고 퉁거우 12호분의 전각도는 중층(重層)의 건물이 그러져 있으며, 안악·1호분은 사방에 대문이 달린 큰 규모의 주택 전체를 높은 위치에서 조각한 그림으로 당시 주택의 건물배치 등을 알 수 있다. 주택의 부속건물을 그린 벽화는 안악 3호분·약수리벽화분·마선구(麻線溝) 1호분·대성리(大城里)1호분·무용총(舞踊塚)·각저총(俑抵塚)·퉁거우 12호분 등에서 볼 수 있으며, 부엌·육고(肉庫)·마구간·방앗간 등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러한 고구려 벽화고분 속의 건축도들은 고구려의 건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성곽>

성곽은 산성(山城) 도성(都城)으로 나눌 수 있는데, 산성은 주로 봉우리와 능선을 따라 큰 계곡을 둘러싸는 이른바 포곡식(包谷式)형태를 취하였으며 토축 또는 석축으로 되어 있다. 도성은 1세기 경부터 등장하는데 중국식 도성제를 채용하면서도 지형조건에 맞추어 산성의 기능을 살린 특유한 형태로 발전시켰고 주변에 산성을 두어 유사시에 피난처로 이용하였다.

4·5세기의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성곽이 그려져 있는 것이 있는데, 여기에는 석축성벽과 여장(女墻)의 조형(祖形)으로 보이는 그림들이 있어 그 때에 이미 성곽의 기본 요소가 갖추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고구려의 성곽은 지안〔輯安〕의 국내성과 위나암(尉那巖)산성, 평양의 안학궁(安鶴宮)과 대성산성(大城山城) 및 평양성이며, 그 밖에 오녀산성(五女山城) 등 지방의 산성들이 있다. 남쪽으로는 백제의 칩입에 대비하여 황해도 일대의 7군데에 산성을 쌓았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서홍(瑞뾔의 대현산성(大峴山城), 배천〔白川〕의 치악산성(雉岳山城) 등이 있다.

[토기]

고구려의 문화를 압록강을 중심으로 하는 전기(4세기 이전)문화와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후기(4세기∼7세기) 문화로 구분지을 때, 4세기 이전의 토기가 출토되는 유적은 압록강·혼강·독로강 유역에 산재되어 있는 돌무지무덤〔積石塚〕과 집자리유적이다. 이들 유적에서 출토되는 토기들은 그 시기에 청천강 이남에서 흔히 출토되는 밑이 둥근 회색 숭석문토기와는 달리, 바닥이 편평하고 배가 부르며 주둥이가 외반(外反)되어 있는 형태의 흑색 와질계(瓦質系)로 만들어진 것이 특색이다.

이러한 4세기 이전의 토기가 중국 토기 문화의 계속적인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 4∼7세기 고구려토기의 특색이며, 그 종류는 대접·항아리·사발·대야·병·골호(骨壺)·벼루·부뚜막 등이 있다. 이 토기들은 대부분 무늬가 없으며 일부 무늬가 들어있는 토기도 백제·신라가야지역 토기에 많이 보이는 타날문(打捺文)·음각문(陰刻文)계의 문양 대신에 직선·파상곡선(波狀曲線)·문살형·원·호상문(弧狀文)·연화문 등을 몸통이나 어깨의 일부분에만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항아리류에는 몸통이나 어깨에 물동이형 손잡이를 같은 간격으로 4개 붙인 것도 있다. 이밖에도 고분에서는 황록(黃綠)·황갈색의 연유토기(鉛釉土器)와 부뚜막이 많이 출토되고 있는데, 이러한 토기는 보다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껴묻기용〔副葬用〕으로 특별 제작된 것인 듯하다. 일반적으로 볼 때 고구려 토기는, 신라·가야지역의 토기가 대개 높은 굽이 달려 있는 회청색 경질토기인 데 비해 연질·오질계로 만든 회색·흑색의 굽이 없는 실용적 토기인 점이 특징 이다.
................................3.백제예술........................................

우리나라 고대의 三國文化는 각기 독특한 성격과 양상을 가지면서 발전하였다. 이중 에서도 百濟의 文化는 高句麗 新羅와 다르게 섬세함과 온아함을 가진 미술문화로 평 가되어 왔다. 소박함이 물씬 풍기는 토기들,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격조 있는 조화를 보이는 기와무늬들, 근엄보다는 고졸한 불상의 미소, 목조건물을 연상케하는 백제 탑 의 기법과 절제된 단순미, 그런가하면 무령왕릉부장유물과 부여에서 출토된 향로에 서 볼 수 있는 화려한 문화예술 수준도 백제의 모습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백제의 문화는 여러 측면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으나,‘바다와 강을 이용할 줄 안 사람들의 문화’로 불려져도 좋을 듯하다. 백제는 다 알다시피 江을 거점으로 王 都를 세우고 또 遷都를 한 나라다. 漢江을 거점으로 한 초기의 漢城時代(B.C. 18 A.D. ∼475), 錦江의 熊津을 중심으로한 熊津時代(A.D. 475∼538), 錦江의 所夫理를 거점으 로 옮긴 후기의 泗 時代(A.D. 538∼660)가 그러한 사실을 잘 보여 준다. 江은 인류 문명의 근원이며 母胎다. 지구상의 주요한 文明이 예외없이 강을 중심으로 발생한 것 은 우연이 아니다.

 

강은 교통으로서뿐만이 아니라 農耕社會가 아닌 安着社會에서는 生命原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좋은 강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百濟가 그 기반을 튼튼히 하고 또 융성할 수 있는 기본 토대였다. 거기다가 일조량이 많은 비옥한 평야를 영토로 하고 있어서 비교적 찬란한 문화를 형성할 수 있었다. 강의 주 변에 펼쳐진 농업의 발달 못지 않게 중요한 지리적 여건은 바다이다. 바다는 크게 두 가지 면에서 문화생성과 그 촉진의 기능을 가진다. 하나는 바다가 주는 식품으로서의 어산물이다. 리아스식에다 조수간만의 차가 많은 서해안은 고기잡이 도구가 발달하지 않은 그때에 식량 공급의 중요한 원천이었음에틀림없다. 특히 소금의 생산은 중요한 몫을 차지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배를 이용한 다른 지역과의 교류이다. 고도의 중 국 문화를 받아 고구려나 신라에 비하여 발달했던 사실은 그런 연유에서이다.


이러한 열린 창구를 통하여 백제는 중국 남조의 선진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백제는 문화면에서 주변의 여러 나라와 서로 깊은 연관을 맺으면서 발전하였다. 같은 부족계통인 高句麗는 물론 중국의 漢族으로부터 문화적 영향을 받고, 다시 이를 동쪽
의 新羅나 바다 건너 후진의 日本에 전해주었던 것이다. 대체로 백제 초기의 문화는 고구려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것으로 보여지지만,웅진 시대부터는 고구려와의 정치 관계가 끊어짐과 함께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그리하여 특히 중국 南朝 문화의 영향은 백제의 문화와 예술의 발달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으니 무령왕 무덤에서 중국 제 사기 그릇들이 나온 일 이라든지, 무령왕 무덤의 구조가 중국에서 유행한 것이라 든지, 瓦當의 연꽃 무늬가 서로 닮은 점이 있다든지, 백제가 기와와 벽돌을 만들면서 중국 남조의 양나라 것을 본받았다는 내용이 적힌 벽돌이 오늘까지 전한다든지 하는 일들이 이를 잘 설명해 준다.


결국 이러한 문화의 형성과정의 차이는 신라문화가 토착문화의 요소를 대체로 강인 하게 지녔던 것과 달리, 백제는 외래 문화의 적극적인 수용으로 문화 발전을 꾀했던, 즉 대외적인 개방성과 적극성을 가지게 하였다.
이렇한 모든 조건들에 의해 이루어진 백제문화 가운데서 건축과 예술을 중심으로 살 펴 보고자 한다.

本 論

1. 건축

§궁궐 건축§
百濟時代의 地上 建築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당시 건축물이 조영 되었던 터가 남 겨져 있어 그 내용을 다소 알 수 있을 뿐이다. 건축물로서 대표적인 것은 궁궐 등의 국가 공공건물과 불교문화의 소산인 사원들이다.
궁궐 건축에 대해서는 백제 진사왕 7년의 기록에 궁전을 수리하고 연못을 새로파고 그 속에 산을 만들어 기이한 짐승과 화초를 길렀다고 하여 4세기 말 궁궐 건축이 매 우 화려하게 이루어졌음을 짐작케 한다. 공주 및 부여에의 천도 이후에는 새로운 궁
궐이 조영 되었는데, 그 위치는 공주와 부여의 인근에 각각 위치하는 것으로 추정되 고 있다. 공주 도읍기 동성왕은 궁궐의 동쪽에 監流閣이라는 50자 높이의 고층건물을 짓고 연못을 조영하는 등 왕과 귀족들의 연회소로 사용하였다.
부여의 경우 왕궁은 부소산성 남측의 관북리, 쌍북리 일대로 추정하고 있는데 일부 지점에 대한 조사 결과 방형의 연못을 비롯한 건물터의 존재가 확인 되었다.

§사원 건축§
백제의 불교가 정착되면서 이에 따라 사원 건축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특히 불교가 발전한 사비시대에 더욱 성행 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의 기록에는 백제가 “절과 탑이 많은 나라”로 표현될 정도였다.
공주에서는 처음 산기슭의 자연 석굴을 이용한 사원 경영이 한 특징이었던 것같다. 그후 政治的 經濟的 安定에 뒷받침되어 都城의 중심부에 大通寺라는 큰 규모의 사찰 이 조영 되었다. 527년에 이루어진 대통사는 공주 도읍기의 대표적 사찰로서 부여의 정림사에 비견할만한 것이다.
부여 천도 이후에는 정림사, 금강사를 비롯하여 동남리, 쌍북리, 구아리, 군수리 등 도성에 많은 사원이 들어서게 되었다. 부여 도성에 지어졌던 백제 사원에서 보면 중 문, 탑, 금당, 강당이 남북 일직선에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인 건물 배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익산에 건설된 미륵사는 국력을 기울여 이루어진 백제의 대사찰이었다. 익산 미륵사 의 경우는 3탑 3금당으로 그 규모가 매우 큰데, 이는 3개의 사원이 하나의 가람으로 형성되는 모양을 보여주고 있다. 중앙부는 목탑, 그리고 양편은 석탑을 배치 하였고 각 구을 회랑으로 구분하였으나 가람의 북측 중앙부에 1개의 대형 강당을 배치함으 로써 결국 미륵사가 하나의 대가람임을 배치상으로 정리하고 있다. 백제는 일본에 불교를 전하엿을 뿐만아니라 불교 건축의 기술자를 파견하여 이를 지 도할 정도로 발달된 건축 기술을 지니고 이었다.

§탑파§
사원의 건축에는 일반적으로 탑의 건축이 부수 되었다. 백제의 탑은 처음 목조탑의 조성에서부터 시작되어 석탑으로 전환 되었다. 목조탑 건축의 흔적은 부여의 군수리, 구아리의 사니와 금강사지, 그리고 익산 왕궁면의 제석사지 등에서 그 예를 볼 수 있
고, 익산 미륵사지에서도 목탑지가 확인 되었다.


백제의 목조탑은 高樓式의 方形多層塔을 조성한 것이었으나 지상 건물은 전혀 잔존 되어 있지 않다. 다만 부여 가탑리의 백제 절터에서 금동제의 탑신편이 출토되어 목 조탑의 대체적인 모양을 짐작케하고 있다.
목조탑이 석탑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석탑은 익산 미륵사지탑과 부여 정 림사지 탑이 있다. 익산 미륵사지탑은 석탑이지만 목조탑의 느낌이 그대로 나타나 있 어 목조탑에서 석탑으로의 전환과정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현재 6층까지 남아 있 으나 원래는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부 구조를 살피면 기단부가 목탑에 있어 서와 같이 낮게 조성되어 있고 그 위에 각 면 4개 씩의 돌기둥으로 1층을 형성 하였 고, 기둥에서의 배흘림이나 목조건축에서와 같은 창방ㆍ평방의 가구가 보인다. 2층 이 상은 초층에 비해 훨씬 얕고 가구 수법도 略化 되었으며 옥개는 판석 처럼 얇고 넓다. 부여 정림사지 5층탑은 미륵사지 것에 비하여 규모가 작고 세부 표현에 있어서 약화된 부분이 많다.

§고분§
백제의 고분은 축조의 재료에 따라 석축묘, 토광묘, 옹관묘, 전축분, 화장묘 등의 종 류가 있다. 백제가 한강 유역에 도읍하고 있던 전기 사회에서는 토광묘와 옹관묘, 그리고 기단 식 적석총이 나타난다. 그중 석촌동의 기단식 적석총은 이 시기의 대표적 무덤으로서
고구려 묘제와의 외형적 유사성으로 유이민 세력인 고구려계 지배집단에 의하여 조영 된 것으로 보인다. 기단식 적석총 이외에 돌을 쌓아올려 연도와 현실을 갖춘 석실을 마련한 이 횡혈석실분의 묘제는 이후 공주, 부여 등지에서 다양하게 나타나는 묘제이기도 하다.

 

 횡혈식 석실분은 흔히 천정의 구조에 의해 형식 분류가 이루어지고 있는 데 그중 처음유형이 궁륭상천정 형식으로 불리는 무덤이다. 구륭상 형식 이후 횡혈식 석실분은 다양한 변화가 일어난다. 무령왕릉을 모방한 형태인 터널형이 그 한 예이다.
부여지역에서는 횡혈식 석실분의 예가 많으나 공주에서와 같은 궁륭상과는 다르다.
이러한 고분은 지하의 구조물로서 백제시대 지상의 건축이 거의 소멸된 상황에서 매 우 중요한 건축의 예가 되며 더욱이 부장 유물의 가장 풍부한 반출이 이에 의하여 이 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백재문화의 이해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원(苑)ㆍ지(池)§
백제시대에는 궁궐 혹은 사원 등의 조영에 흔히 연못을 축조하여 이를 재치 하였다. 기록상으로는 백제 진사왕 7년(391) 궁궐을 중수하면서 연못을 조영하고 여기에 진귀 한 새와 기이한 화초를 길렀다고 하였다. 공주 도읍기에는 동성왕 22년(500)에 궁 동 쪽 임류각과 연결하여 역시 연못을 조영하고 기이한 물고기를 키웠다. 또 사비시대인 무왕 35년(634)에는 궁궐 남쪽에 못을 파고 물을 20여리에서 끌러들여 언덕에는 버드 나무를 심고 못 안에는 섬을 만들었다.

2. 조각

§불상조각§
백제의 불상은 현재 대부분이 사비기의 것이 일반적이다. 백제의 불상은 현재 금동 불이 대부분이며 그 이외 석불 및 마애불도 소수가 전하고 있다. 특히 금동불의 경우 는 그 크기가 대부분 한자 이내이기 때문에 그 이동성이 원활하여 가까운 일본에도 많은 수가 전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반면 이동하는데 불편함이 따르는 석불 및 마애 불의 경우는 자연적 또는 인위적인 훼손이 심해 현존 상태가 양호하지 못한 것이 많 은 편이다.

3. 공예

백제는 지역적 특수성으로 인하여 진보된 靑銅器文化를 소유하였던 마한 지역의 전 통을 바탕으로 하고, 여기에 漢代 및 高句麗의 발달된 金屬工藝技術을 받아들여 가미 하였다. 또한 三國時代의 토도공예는 각국의 특색이 뚜렷이 나타나서 그들 자체의 문 화적 성격과 배경을 보여주고 있는데, 백제는 부드럽고 세련된 멋을 풍긴다. 이러한 문화적 성격은 토기와 瓦塼에서도 나타나는데, 토기는 회색에 가까운 색조에 다양한 기형을 보이며, 기와는 위덕왕 35년9588)에 일본에 박사를 파견할 정도로 발전되어 있 었고, 고구려나 신라에 비하여 전을 사용한 예가 상당히 많이 나타난다.

結 論

百濟의 文化는 백제가 처한 地理的인 조건, 즉 漢江流域의 평탄하고도 비옥한 자연 환경과 금강, 영산강 등 충청 호남지역의 넓은 농경지와 바다라는 풍요로운 자연조건 을 기반으로 하면서, 점차 고구려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백제특유의 온유하고도 세련 된 성격으로 변모되어 갔다.
사실 따지고보면 백제문화가 전반적으로 다양하면서도 온화함과 섬세함이 곁들여진 것은 고대 농경사회의 풍요가 밑바탕된 것이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백제는 해로로 연결되어 있던 中國 南朝의 문화적인 영향을 적극적으로 받 아들임으로써 발달된 중국대륙의 문화수준과 직접 비교될 문화들을 남겼다. 이같은 문화적 개방성과 외래 문화 수용의 적극성은 중국 外交過程에서 잘 드러나 있듯이 한 반도내에서 三國이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었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 경쟁에서 백제는 우위권을 가지기 위하여 부단한 교섭을 전개하였던 것이고, 지리적으로 유리 한 위치를 최대한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가하면 백제는 스스로 발전시킨 문화 를 이웃 일본이나 신라에 전파하는 교량역할도 충실히 담당하였다. 그리고 이는 백제 의 문화적인 왕성한 활동성과 자부심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백제가 신라에 비하여 문화적 선진국이었음은 문화전파의 흔적들에서 찾아 볼 수 있 다. 新羅가 국력을 기울여 세운 황룡사도 동양최대의 가람인 미륵사를 창건할 수 있 엇던 백제의 기술 원조를 바탕으로 이룩된 것이었다. 한편으로 백제는 해로로 연결되어 있던 중국 남조의 문화적인 영향을 적극적으로 받 아들임으로써 발달된 중국대륙의 문화수준과 직접 비교될 문화들을 남겼다. 이같은 문화적 개방성과 외래 문화 수용의 적극성은 대 중국 외교과정에서 잘 드러나 있듯이 한반도내에서 삼국이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가하면 백제는 스스로 발전시킨 문화를 이웃 일본이나 신라에 전파하는 교량 역할도 충실히 담당하였다. 그 리고 이는 백제의 문화적인 왕성한 활동성과 자부심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출처 : 동수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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