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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날의 내 초상 ‘경주 수학여행’ (2)

홍미인 2018. 10. 17. 13:08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날의 내 초상 ‘경주 수학여행’ (2)
경주 수학여행 답사기
 
홍민자 기자 기사입력 2018/10/08 [18:30]

분황사

분황사는  634년(선덕여왕 3) 경주에 세운 절이다.

이 절의 모전석탑은 신라 석탑 중 가장 오래된 석탑이다. 솔거가 그린 분황사의 관음보살이 유명하다. 자장과 원효가 이 절에 머물렀다. 왕 분사(王芬寺)라고도 한다. 고려시대 원효의 화쟁국사비(원효)가 세워지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임진왜란 때 화를 당하고 광해군 때 약사여래를 조성하였다. 

 

▲ 분황사 모전탑     ©홍민자 기자

  

신라에는 예로부터 부처님과 인연을 맺었던 7곳의 가람터가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용궁 남쪽의 분황사이다. 선덕여왕이 창건한 분황사의 '분황(芬皇)'은 '향기 날 분', '황제 황'자로 향기 나는 황제란 절이란 뜻이다. 인평으로 연호로 바꾼 그 해 창건된 분황사는 신라 최초로 여왕에 올라선 것을 내외에 알리는 상징적인 절임을 알 수 있다.

 

분황사 석탑에서 나온 사리장엄구에도 가위 등 여자와 관련된 유물이 있었다.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은 신화(神畵)로 알려질 만큼 유명했다.

 

중국에서 대장경 1부를 가지고 돌아 온 자장은 분황사에 주석하였다. 분황의 진나(陳那, 480~540년경)로 알려진 원효도 일찍이 분황사에 주석하면서 화엄소를 짓다가 제4 십회향품에 이르자 붓을 놓기도 하였다. 분황사에는 설총이 원효의 유해를 부수어 만든 소상이 모셔져 있었는데 설총이 예배를 드리자 돌아섰다고 하는데 고려 당시에도 돌아선 채로 있었다 한다.

 

문무왕 때 분황사 옆 마을에 살고 있던 엄장이 아미타신앙을 닦았다. 광덕은 처와 동거를 하였지만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는데 처는 분황사의 여종으로 관음보살의 19응신의 하나로 광덕과 살았다.

 

755년(경덕왕 14) 분황사의 약사여래동상을 주조하였는데, 무게는 30만 6,700근이요, 장인은 강고(强古) 내말(乃末)이다. 같은 왕 때 한 여인 희명(希明)의 아이가 태어난 지 다섯 달 만에 눈이 멀어 이 절의 천수대비(千手大悲)에게 기도하였더니 눈이 떠졌다.

 

 

▲ 분황사 석정     ©홍민자 기자

 

원성왕 때 분황사 우물에는 나라를 지키는 호국 룡이 있었는데 당나라 사신이 하서국 사람을 시켜 용을 물고기로 변하게 하여 데리고 가려고 했던 적도 있다. 진성여왕 때 분황사 옆에 살던 가난한 여인이 품을 팔아 어머니를 부양하였다.

 

고려 숙종 때 원효에게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렸고 명종 때 화쟁국사비를 분황사에 건립하였다. 현재 비신은 멸실되고 좌대만 존재한다. 이좌대가 원효의 것이라는 것을 추사 김정희가 발견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분황사 석탑을 수리하면서 2층 탑신 내부에서 발견된 사리함 속의 출토유물 가운데 상평오수(常平五銖), 숭녕중보(崇寧重寶) 등 발행 시기를 가늠할 수 있는 중국 주화가 나왔다. 숭녕 연간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에 분황사 석탑을 수리했음을 알 수 있다.

 

1998년 보광전 수리공사시 해체한 종도리에서 확인된 보광전 중창과 중수 내용을 기록한 상량문(上梁文)에 의하면, 분황사가 지금처럼 사역이 축소된 시기는 임진왜란 이후로 여겨진다. 임진왜란 때 약사여래도 화를 당했다. 1608년(광해군 원년) 보광전(普光殿) 등의 전각을 중창하고, 5,360근의 청동으로 약사여래를 주조·봉안하였다. 1680년(숙종 6)에는 허물어져 가던 보광전을 중수하였으며, 상량문은 이때 작성하였던 것이다.

 

▲ 대성 화쟁국사비 기단부 (원효)     ©홍민자 기자

 

분황사는 창건 이후 최소 3차례 이상 가람배치 변천과정을 거쳐 지금은 3차 중건 금당인 보광전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다. 창건 가람은 석탑을 남쪽 중앙에 배치하고 그 북쪽에 남향의 삼금당을 ‘ 품(品)’자형으로 배치한 소위 ‘일탑삼금당식’ 가람배치였다.

 

분황사 탑은 현재 한국에서 창건 연대가 알려진 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탑이다. 탑의 사방에는 물개 또는 사자로 추정되는 동물석상이 세워져 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사자의 다리는 보수를 하였다.

 

1차 중건 가람은 창건 당시 삼 금당을 모두 폐기하고 창건 중금당지의 규모를 확장하여 1동의 대형 금당으로 통합한 ‘일탑일금당식’ 가람배치로 바뀌었다. 더불어 석탑 남쪽에는 중문을 건립하고 중문 좌우로는 남 회랑을 건립하였다. 금당, 석탑, 중문은 모두 남북 중심선을 공유하고 있으며, 중문과 남 회랑은 동서 중심선을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2차 중건 금당은 1차 중건 금당에 비하여 그 면적이 1/5로 축소되고 건물의 방향도 이전까지의 남향이 아닌 서향으로 바뀌었다. 3차 중건 금당에 해당하는 현존 보광전은 2차 중건 금당처럼 서향으로 중건되었으며, 그 면적은 2차 중건 금당 대비 1/3로 다시 축소되었다.

 

이처럼 같은 위치에서 반복된 여러 번의 중복으로 인하여 유구의 결실이 매우 심한 편이며, 대부분 개축되는 후대 금당에 의하여 직전 금당의 선행 유구가 파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창건 중금당 유구는 동일 위치에서 면적이 확장된 일차중건 금당에 의하여 하층 기초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이 결실되었으며, 2차 중건 금당이 세워졌던 1차 중건 금당 지 동반 부는 다시 대부분의 유구가 결실되었다. 그리고 현존 보광전이 위치하고 있는 2차 중건 금당 지 중심부에 대한 유구조사는 아예 불가능한 상황이다.

 

▲ 첨성대     ©홍민자 기자

 

첨성대

 첨성대는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신라시대의 천문대. 신라 왕궁 터인 반월성의 북서쪽 성곽에서 약 300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다. 국보 제31호이며,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우리나라 고대 건축물 중 유일하게 일체의 재건이나 복원 없이, 그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삼국유사에는 7세기 중엽 신라의 선덕여왕이 건립했다고 밝히고 있다.

 

別記云是王代鍊石築瞻星臺 별기에 따르면 이 왕(선덕여왕)의 치세에 석축을 쌓아 첨성대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삼국유사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 中≫

 

높이 9.17m, 밑지름 4.93m, 윗지름 2.85m로 중간에 정사각형의 문이 있으며 상방하원(上方下圓)의 형상을 갖춘 돌탑 형식으로 축조되었다. 이러한 구조는 어떤 주술적 또는 학술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주장이 있다.

 

당대의 우주관은 천원지방, 즉 하늘이 둥글고 땅이 모나있다고 믿는 것이었는데 첨성대는 그 반대의 형상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362개의 화강암 벽돌을 이용해 27단의 석축을 쌓았다는 것 역시 '1년'의 시간과 28수 별자리, 혹은 27대 국왕인 선덕여왕을 상징하는 의미로 보기도 한다. 첨성대의 내부는 제12단까지 흙으로 채웠고 맨 위에 우물 정(井)자의 장대석이 있으며, 과거에 그 위에 관측기구를 놓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첨성대의 용도는 천문관측으로 전해졌으며 조선말까지는 별다른 이견이 없었으나 광복 이후 여기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가 나오게 된다. 첨성대의 용도에 여러 견해가 나온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삼국사기에는 관련 기록이 등장하지 않으며, 삼국유사에는 천문대라는 명칭과 용도가 나와 있고 사람이 오르내렸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렇다고 하기엔 내부가 매우 좁고 불편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천문관측을 하는 시설인데 정작 다른 천문대처럼 산 위나 높은 곳이 아니라 왕궁 옆의 평지에 건설되어 있다. 더 결정적인 문제는 고작 10미터 더 올라간다고 해봐야 딱히 별을 관측하는데에 큰 도움은 안 되기 때문(...) 높이로 따지면 옆에 있는 왕궁 경주 월성이 지형적으로 높은 곳이라서 오히려 하늘에서 더 가깝다. 그래서 제단(祭壇)이나 창고, 기념물 등으로 사용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이 쪽도 결정적인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서술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주류 학계에서는 천문대로 여기고 있다.

 

첨성대의 위치나 높이에 관한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해명이 있다. 고대의 천문관측은 현대의 천문학과는 성격이 매우 달라서 국가의 길흉을 점치는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이런 역할을 수행하는 시설은 당연히 왕궁에 가까워야 한다. 즉, 첨성대의 천문관측은 학술적인 연구가 아니라 점을 보는 용도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이는 첨성대를 점성대(占星臺)라고 기록하기도 했다는 점에 의해서 뒷받침 된다. 포석정처럼 용도에 대해서 뭔가 찝찝한 뒷맛이 남은 곳이다.

 

첨성대의 지반은 지하 16m까지 퇴적층, 그 아래는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북쪽 지반이 약해 급속한 침하가 이뤄질 수 있으며, 경주 일대는 활성단층인 불국사 단층선이 지나가는 지진 위험지대이기 때문에 유지 보수에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전 근대 한국의 지진 목록을 살펴보면 알겠지만 역사적으로 경주 지역은 강진이 빈번했었고, 조상들 역시 첨성대를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고안했다. 하부에 진흙을 채워 넣은 것도 무게중심을 잡기 위해서라는 설이 있으며, 꼭대기 장대석의 경우 모델 실험을 통해 진동이 발생할 때 일종의 지지대가 되어, 하단의 돌이 어긋나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첨성대는 현대 들어서 금이 많이 가고 피사의 사탑처럼 기울어짐이 심해지고 있다. 하지만 문화재청은 2014년 10월 1일 첨성대는 안전성에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우리에게 해설을 해준 정윤화해설사는 나보고 3일만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어보라고 농담을 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 1,300년을 한 자리에 서 있는 뚝심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러면서 2017년 경주지진이 일어나면서 첨성대가 원래는 중심축에서 북쪽으로 20.4cm 비스듬히 서 있었지만, 지진으로 2cm 더 기울어졌다. 포항지진은 다행히 첨성대에 아무 문제를 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많은 틈새가 생겨 넓어졌는데 우리 곁에서 오래 남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 무열왕릉    ©홍민자 기자

 

이틀 째 되는 날 아침을 먹고 무열왕릉(김춘추)으로 갔다. 무열왕은 왕이 되기전 딸과 사위의 원수를 값는다고 일본으로, 고구려로 다니다가 결국은 당나라와 연합해서 신라 통일의 발판을 마련하기도 했다.벌써 아침 기운은 서늘해서 산책하기에는 너무 좋은 날씨였다. 나머지 일정을 소화하기위해 서둘러 두 대에 나눠타고 동남산 계곡으로 가서 경주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을 봤다.

 

불상은 보물 제201호로 불상은  사면에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불상 높이가 900㎝나 되는 거대한 바위의 4면에 불상·보살상을 비롯하여 승상·비천·속인 등 23구의 인물상과 탑·사자·나무 등을 얕은 부조와 선각으로 빈틈없이 조각한 조상군이다. 이 바위의 남쪽에는 목조건물을 세웠던 주춧돌 자리가 있고 '神印寺'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일제강점기에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바위에 새겨진 9층의 탑을 보고 황룡사 9층목탑의 모델일 것이라고 한다.

 

▲ 경주 남산탑골 마애불상군(보물 제201호)     ©홍민자 기자

 

경주남산탑곡마애불상군(보물 제201호)      

바위의 4면 가운데 가장 면적이 넓은 북면에는 목탑형식의 9층탑과 7층탑이 좌우에 새겨져 있고 그 밑에는 긴 꼬리가 달린 동물이 마주보고 있다. 두 탑의 상륜부 사이로는 머리에 보개가 늘어진 불상이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고, 9층탑 꼭대기에는 비천상 1구가 조각되어 있다. 특히 북면에 새겨진 탑의 형태는 기단에서부터 상륜부의 앙화까지 갖춘 목탑형식으로 신라시대의 목탑양식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이다.

 

동면은 3개의 바위로 구성되었는데 왼쪽에는 삼존불상과 천의자락을 휘날리며 날고 있는 6구의 비천상이 표현되어 있고, 그 아래로는 삼존불의 본존을 향하여 무릎을 꿇고 공양하는 승려가 있다. 동면의 중앙에 있는 바위에는 두 그루의 보리수 아래 앉아 참선하는 승상과 그 바위 앞에 조각된 보살상 등 모두 11구의 불상·보살상이 새겨져 있다. 서면에는 동면의 본존상과 흡사한 여래상과 2구의 비천상이 새겨져 있다.

 

▲  경주남산마애불상군   ©홍민자 기자

 

남면은 40㎝ 정도 틈이 벌어진 2개의 바위면으로 되어 있는데 오른쪽에는 바위면을 약간 파내고 그 안에 삼존불상을 얕은 부조로 표현했고, 왼쪽에도 같은 기법으로 승상 1구를 조각했다. 삼존상 앞의 또다른 바위에는 왼쪽으로 몸을 튼 승상이 새겨져 있다. 또한 이들 부조상의 왼쪽 편에는 얼굴과 광배의 일부가 파손되었지만 거의 환조에 가까운 독립된 석불입상이 있는데 상의 양감과 굴곡선이 강조되었다.

 

이 마애불상군은 4면에 각기 다른 크기와 모양의 조상들을 독특하게 배치하여 자유로운 구도를 보여주는 불상조각군으로 후대에 나타나는 사방불의 개념과는 다른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불상의 형태는 양식적으로 살펴볼 때 둥근 얼굴에 미소를 띤 표정이나, 조각기법이 치졸하고 평면적인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신라 말기인 7세기 중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옛날 우리 조상들의 섬세하고 화려한 조각을 보며 새삼 우리의 문화재가 소중하다는 것을 알았다. 돌아오는 길에 소중한 문화재라고 또는 보호한다고 그냥 두면 안되는 것을 알았고 잘 이용하여 남한산성의 객사 인화관이나 동사강목을 쓴 순암 안정복의 이택재 등을 이용하여 문화컨텐츠를 발굴해서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문화재로 재탄생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출처 : 경기도문화관광해설사회
글쓴이 : 광주(홍민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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