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連臂 1000여 명 둔 「애기接主」
昌巖(창암)이 과거장에서 목격한 부패한 현실은 무너져가는 朝鮮王朝 사회의 한 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朝廷의 부패와 무능에 더하여 급증하는 外國商品의 유입과 米穀의 유출, 그리고 계속된 흉년과 질병 등으로 말미암아 민중의 고통은 날로 심각해져 갔다. 민중의 불만은 들불처럼 번지는 이른바 民亂과 火賊(화적)의 횡행으로 표출되었다. 1876년의 개항부터 1894년의 동학 농민전쟁에 이르기까지 전국 각지에서 전개된 농민들의 봉기는 100여 건에 이르렀는데, 극심한 旱災(한재)가 발생했던 1893년 한 해에만 65건이나 되었다.1)
黃海道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1880년에는 長淵에서, 1885년에는 兎山(토산)에서, 1893년에는 載寧(8월)과 黃州(11월)에서 농민들이 봉기했다. 특히 황주는 1차 봉기의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자 이듬해 1월에 다시 일어났는데, 그것은 사망자 21명과 부상자 70여 명의 많은 희생자를 낸 대규모 봉기였다.2) 이처럼 민중의 분노는 폭발하는 화약고와 같이 잇달았다.
사회적 불안은 민중의 심리적 불안을 부채질했다. 그럴수록 의지할 곳을 잃은 민중은 현실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유토피아적인 민간신앙에 빠져들었다. 「鄭鑑錄(정감록)」의 예언이 새로이 부활하고, 이러저러한 流言들이 널리 퍼지고 있었다.
퍼지는 「鄭鑑錄」의 예언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昌巖도 「정감록」의 예언과 관련된 괴이한 소문을 들었다.
〈어디서는 異人(이인)이 나타나서 바다에 떠다니는 화륜선을 못 가게 딱 붙잡아 놓고는 세금을 내어야 놓아 보낸다.〉
〈머지아니하여 鄭都令이 鷄龍山에 도읍을 정하고 李朝 국가는 없어질 것이니 밭은 목에 가서 살아야 다음 세상에서 양반이 된다고 아무개는 계룡산으로 이사했다.〉3)
이처럼 종말론적 세계관을 반영한 「정감록」의 주장은 당시의 정치현실과 사회상을 잘 드러낸 것이었다. 따라서 「정감록」에서 제시하는 방안은 민중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그것은 또한 支配層에 대한 노골적인 적개심을 선동한 것이어서 그 시대의 민중심리를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고통 속에서 신음하던 민중은 적극적인 자기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처럼 초인적인 운명에 따름으로써 현실이 타개되기를 바라고 있었다.4)
이 무렵 昌巖은 東學에 대한 신비한 소문을 들었다. 텃골에서 남쪽으로 20리 떨어진 浦洞(포동)의 吳膺善(오응선)과 그 이웃 동네의 崔琉鉉(최유현)이 충청도의 崔道明(최도명)이라는 東學선생에게 입도하여 공부를 하고 있는데, 그들은 방에 드나들 때에 문을 여닫지도 않고, 문득 있다가 문득 없어지며, 공중으로 걸어다니고, 그 선생 최도명은 하룻밤 사이에 충청도를 왔다 간다는 등의 소문이었다.5)
崔道明이란 천도교의 2세 교조 崔時亨(최시형)을 가리키는 말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소문은 앞날의 진로를 놓고 정신적 방황을 하고 있던 昌巖을 현혹시켰다. 그는 소문의 주인공을 만나서 사실을 확인해 보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소문 듣고 東學道人 집 찾아
1893년 정초에 昌巖은 포동 吳膺善의 집을 찾았다. 고기를 먹지 않고 목욕하고 새옷으로 갈아 입고 가야 접대를 한다는 말을 듣고 昌巖은 정성을 들여 그대로 실천했다. 목욕하고 머리 땋고 푸른 道袍(도포)에 綠帶(녹대)를 매고 집을 나섰다.
吳膺善의 집 문 앞에 이르자 방에서 무슨 글 읽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것은 詩나 經典을 읽는 소리와는 달랐고 마치 노래를 합창하는 것 같기도 했으나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東學敎徒들이 경전을 암송하고 있는 것을 처음 듣는 昌巖이 알아차릴 턱이 없었다.
昌巖은 겸손한 자세로 주인을 찾았다. 젊은 청년 한 사람이 나와서 昌巖을 맞았다. 昌巖은 吳膺善도 양반임을 알고 갔었는데, 그는 상투를 틀고 通天冠(통천관)6)을 쓰고 있었다. 昌巖이 공손히 절을 하자 그 역시 공손히 맞절을 하고 나서 『도령은 어디서 오셨소?』 하고 물었다.
난생 처음으로 양반으로부터 존대를 받은 昌巖은 너무나 황송하여 신분을 밝혔다.
『저는 어른이 되었더라도 당신께 공대를 받지 못할 상놈입니다. 하물며 아직 아이인데 어찌 공대를 하나이까?』
그러자 吳膺善은 도리어 감동하는 빛을 보이면서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
『천만의 말씀이오. 나는 다른 사람과 달리 東學道人이기 때문에 선생의 교훈을 받아 빈부 귀천에 차별 대우를 하지 않습니다. 조금도 미안해 하지 마시고 찾아오신 뜻이나 말씀하시오』
金九는 이때의 감회를 〈이 말만 들어도 별천지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7)고 적고 있는데, 이는 그가 얼마나 상놈된 한이 뼈속까지 사무쳐 있었던가를 말해 준다.
『제가 오기는 선생께서 동학을 하신다는 말을 듣고 道理를 알고 싶어 왔습니다. 저 같은 아이에게도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처럼 알고 싶어 오셨다는데, 내가 아는 데까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동학이란 어떤 宗旨(종지)이며 어느 선생이 천명하셨습니까?』
『동학은 龍潭(용담) 崔水雲 선생이 천명하셨습니다. 선생은 이미 순교하셨고, 지금은 그 조카 崔海月 선생이 大道主가 되어 포교 중입니다. 동학의 종지로 말하면 말세의 간사한 인간들로 하여금 개과천선하여 새 백성이 되게 하여 가지고 장차 참주인을 모시고 鷄龍山에 新國家를 건설하는 것입니다』8)
東學은 1860년에 水雲 崔濟愚(최제우)가 儒敎, 佛敎, 道敎의 원리와 함께 당시에 農民들 사이에서 널리 신앙되고 있던 風水地理說, 귀신 신앙, 鄭鑑錄 사상, 治病術 등 온갖 민간신앙과 샤머니즘을 융합하여 창립한 종교사상이다.9) 崔濟愚는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하늘님을 모시고 있다〉는 「侍天主(시천주)」의 원리를 定立했다. 2세 교조 崔時亨은 〈사람은 곧 하늘님이다(人是天)〉, 〈사람 섬기기를 하늘님같이 하라(事人如天)〉고 주창했다. 그는 〈베 짜는 며느리가 하늘님이며, 어린이를 때리는 것은 하늘님을 때리는 것이다〉라고 하여 한층 확대된 平等思想을 주창했다. 그는 동학에 입도하면 그날로 身分의 차별없이 맞절을 하게 하고 서로 「接長」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게 했다.10) 이처럼 동학의 평등사상은 崔濟愚의 「侍天主」에서 출발하여 崔時亨의 「事人如天」 단계를 거쳐서 뒤에 3세 교조 孫秉熙(손병희)의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人乃天(인내천)」을 통해서 완성된다. 이와 같이 동학은 사람을 하느님과 동격에 놓고 人間의 尊嚴性을 강조한 평등사상과 함께 민중에 친근한 부적과 주문 등 주술적인 포교수단 때문에 基督敎보다 더 빠르게 農民들에게 파고 들었다.11)
민중은 동학에 들어가면 굶주림과 온갖 질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은 三政(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과 빈번한 질병에 시달리던 민중에게는 가장 절박한 생존의 희망이었다. 동학은 병을 고치는 방법으로 주문을 외우는 것 말고도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도 하고 부적을 씹어 삼키거나 그것을 불에 태워 그 재를 물에 타 먹는 등의 방법을 사용했다.
이러한 민중의 治病에 대한 믿음은 全琫準(전봉준)의 진술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그는 동학에 입도하여 하늘을 공경하고 마음을 지키면 괴질에 걸리지 않는다고 진술하고 있다.12) 또한 치병과 함께 免禍(면화)도 민중이 동학에 입도하는 중요한 동기였다. 민중은 부적을 태워 마시면 액운을 막을 수 있다는 崔濟愚의 말13)에 이끌려 동학에 몰려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동학이 경상도 일대를 풍미하게 되자 조정에서도 이를 주목하게 되었다. 특히 동학의 주문이나 그밖의 문장에 「天主」, 「上帝」 등의 말이 있고, 이것이 天主敎와 혼동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여, 崔濟愚는 1864년 3월에 大邱府 남문 밖에서 「惑世誣民(혹세무민)」, 「邪道亂正(사도난정)」이라는 죄명으로 梟首(효수)형에 처해졌다.
平等思想과 새 國家建設說에 매료돼
吳膺善이 昌巖에게 동학의 敎義를 얼마나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무튼 昌巖은 오응선과의 면담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신분차별에 따른 처절한 좌절감을 느끼고 있던 昌巖은 무엇보다도 동학의 평등사상에 마음이 끌렸다. 그는 동학에 입도만 하면 차별 대우를 철폐한다는 말이나 李氏王朝의 운세가 다하였으므로 장차 새 국가를 건설한다는 말에서 지난해에 과거장에서 겪었던 쓰라린 기억이 되살아났다.
金九는 이때의 감회를 〈내 相(상)이 나쁜 것을 깨닫고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를 맹세한 나에게는 하늘님을 몸에 모시고 하늘 도를 행한다는 말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고 회상했다.14)
昌巖은 동학에 입도할 마음이 불같이 일어났다. 그는 吳膺善에게 입도 절차를 물었다. 오응선은 쌀 한 말과 백지 세 묶음과 누런 초 한 쌍을 가져오면 入道式을 거행해 주겠다고 말했다. 昌巖은 오응선의 집에서 「東經大全」, 「龍潭遺詞(용담유사)」, 「弓乙歌」 등의 동학 경전을 훑어본 뒤에 집으로 돌아왔다.
흥분된 심정으로 집으로 돌아온 昌巖은 아버지 淳永(순영)에게 오응선을 만난 일을 자세히 보고했다. 淳永은 昌巖의 동학 입도를 흔쾌히 승낙하고 필요한 예물을 준비해 주었다. 이 무렵 淳永이 東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괄괄한 성품인 淳永이 아들의 뜻을 존중하는 모습을 여기에서도 볼 수 있다. 昌巖은 아버지와 함께 준비한 예물을 가지고 가서 곧장 동학에 입도했다.
昌巖은 동학의 敎義를 열심히 배우는 한편 布敎에도 열성을 기울였다. 淳永도 아들을 따라 동학에 입도했다. 동학은 불만에 가득 찬 昌巖의 젊은 열정을 빠르게 흡수해 갔다. 昌巖이 지난날의 자신을 벗어 던지고 새로운 세계로 뛰어들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은 이름을 바꾼 것이었다. 그는 동학에 입도하자마자 아명인 昌巖을 버리고 昌洙로 개명했다.
外國公館과 敎會堂에 榜文 나붙어
昌洙가 동학에 입도할 무렵 동학교단은 확대된 교세를 바탕으로 하여 억울하게 처형된 교조 崔濟愚의 伸寃(신원: 復權)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동학교도들은 1892년 10월과 11월에 公州와 전라도 參禮에서 집회를 열고 崔濟愚의 신원과 정부의 동학교도 탄압 중지를 요구했다. 이어서 1893년 2월에는 孫秉熙 등 40여 명의 교도들이 서울로 올라와서 왕에게 직접 교조 신원과 동학 포교의 공인을 호소하는 伏閤上疏(복합상소)를 올렸다. 동학교도들은 世子의 誕辰日을 기념하여 2월8일에 열리는 慶科(경과)를 이용하여, 과거보러 가는 선비로 가장하고 서울로 들어갔다.16) 사흘 동안 光化門 앞에서 무릎을 꿇고 哭(곡)을 하면서 국왕에게 복합상소를 올린 이들은 『소원대로 시행하겠으니 모두 집으로 돌아가서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국왕의 귀가권유의 명을 받고 순순히 해산했다.17)
동학교도들의 복합상소 직후에 「斥洋斥倭(척양척왜)」를 주장하는 榜文(방문)이 서울의 각국 公使館과 敎會堂에 나붙어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했다. 2월14일 밤에 미국인 기포드(D. L. Gifford) 학당의 문에 방문이 붙은 것을 시작으로 18일에는 미국인 존스(H. J. Jones)의 집에, 20일에는 프랑스 공사관에, 3월2일에는 일본공사관의 벽에 방문이 붙었다.
특히 존스의 집과 프랑스 공사관에 붙은 방문에는 3월7일까지 철수하지 않으면 聲討하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18) 일본 공사관에 붙은 방문은 〈하늘이 이미 너희를 미워하고 우리의 스승이 이미 너희를 경계하라 하였으니 죽느냐 사느냐는 너희에게 달려 있다.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다시 말하노니 급히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19)는 더욱 위협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위기감을 느낀 일본 변리공사 오이시 마사이(大石正己)는 2월24일에 본국에 군함 파견을 요청했고, 日本 政府는 군함 1척을 仁川에 파견했다. 그러자 淸國, 英國, 美國도 차례로 군함을 조선에 파견했다. 일본인이 느꼈던 위기감이 얼마나 절박했는가는 일본 영사 스기무라(杉村濬)가 2월27일에 서울 거류민들에게 유사시의 행동요령을 시달하는 內諭(내유)를 보내고 있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일본 공사관은 자국 상인들의 영업에 지장을 초래할 것을 염려하여 조선 정부에 강력히 항의하고 엄중한 수사를 요구했다.20)
그리하여 서울의 민심은 흉흉했다. 金允植은 〈서울 시내는 동학당이 洋館에 掛書(괘서)를 하여 초이렛날에 구축하겠다는 설 때문에 자못 소요를 이루었다〉21)고 당시의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昌洙의 接에는 常民들이 몰려
복합상소를 한 東學敎徒들이 해산하자 조정에서는 교조 신원을 해주기는커녕 전라도 관찰사 李耕稙(이경직)을 교도들이 上京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고 하여 파면하고, 지방관들에게 敎徒들을 엄중히 단속하라고 지시했다. 그리하여 東學敎徒들에 대한 탄압은 오히려 더 심해졌다.
목숨을 건 伏閤上疏가 물거품이 되고 탄압이 더욱 심해지자 東學敎徒들은 한 달 뒤인 3월11일부터 20여 일 동안 충청도 報恩 帳內里(장내리)에서 2만7000명이 참가하는 대규모의 시위 집회를 열었다. 이것이 유명한 報恩聚會(보은취회)이다. 그리고 이 집회에서 주장한 것은 「교조신원」이 아니라 뜻밖에도 「斥倭洋倡義(척왜양창의)」였다.
그런데 이러한 교단의 움직임이 黃海道地方 동학교도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당시 황해도에서는 양반들이 동학에 가입하는 경우가 전혀 없지는 않았으나 매우 드물었다. 반면에 억울하고 고통받는 상민들 가운데에서 동학에 입도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났다. 昌洙는 상민인 만큼 상민들을 많이 입도시켰다. 그리하여 불과 몇 달 만에 昌洙의 連臂(연비)는 수백 명에 이르렀다.22) 동학에서는 도를 전한 사람을 淵源(연원)이라 하고 도를 전해 받은 사람을 連臂라고 했는데, 연원과 연비의 관계로 맺어져 있는 동학 조직제도를 淵源制 또는 連臂制라고 불렀다.23)
昌洙의 명성이 점차 알려지자 그에 대한 터무니없는 流言이 사방으로 퍼졌다. 호기심에 찬 사람들이 昌洙를 찾아와 물었다.
『그대가 동학을 해보니 무슨 造化가 생기던가?』
그럴 때마다 昌洙는 솔직히 대답했다.
『나쁜 일을 하지 않고 선한 일을 하게 되는 것이 동학의 조화입니다』
그러나 昌洙의 답변은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특별한 조화를 기대하고 찾아온 사람들은 昌洙의 이러한 말을 곧이 듣지 않았다. 그들은 昌洙가 자기네들에게 조화를 보여 주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 오히려 그들은 『昌洙가 한 길 이상 공중에서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는 등의 말로 더 근거 없는 유언을 퍼뜨렸다.
昌洙의 신통력에 대한 소문은 黃海道는 물론이고 멀리 平安道에까지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리하여 그의 연비 수는 급속히 증가하여 1000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24) 이러한 사실은 東學의 전파가 얼마나 민중의 造化나 異蹟(이적)에 대한 기대심리에 바탕을 두고 있었던가를 말해 준다. 昌洙는 황해도와 평안도의 동학교도 가운데에서 나이 어린 사람으로서 가장 많은 연비를 가졌다고 하여 「애기접주」라는 별명을 얻었다.25) 물론 그때까지 昌洙가 정식으로 接主 첩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2) 報恩에 가 崔時亨에게서 接主 첩지받아
昌洙가 동학 포교에 열성을 다하고 있는 동안 해가 바뀌어 1894년 甲午年의 새해가 밝았다. 1894년은 이 나라 역사에 일찍이 찾아볼 수 없는 큰 지각변동이 있었던 해였다.
먼저 1월10일 이른 새벽에 全羅道 古阜(고부)지방에서 농민들이 봉기했다. 고부군수 趙秉甲의 탐학에 견디다 못한 고부 농민들은 全琫準의 지휘 아래 봉기를 감행했다. 고부 농민봉기는 이전의 민란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郡守 처단, 全羅監營 점령, 서울 진격」이라는 구호를 내걸므로써 한 읍의 차원을 뛰어넘어 왕조사회 전체를 부정하는 차원으로 문제를 확대시켰다.
놀란 조정에서는 농민 봉기의 수습을 위해서 李容泰를 按♥使(안핵사)로 파견했으나, 그의 지나친 횡포는 농민들의 가슴속에 새로운 불씨를 지펴, 3월20일에 全琫準을 대장으로 하고 孫和中과 金開南을 總管領(총관령)으로 한 전라도 농민군이 茂長에서 전면적인 봉기를 감행했다. 마침내 東學農民戰爭의 막이 오른 것이었다. 이때에 내건 농민군의 슬로건은 「輔國安民(보국안민)」과 「除暴救民(제폭구민)」이었다.
「全州和約」 맺고 물러나 執綱所 설치
농민군은 전라도 일대를 휩쓸고, 4월 27일에는 全州城을 점령했다. 그런데 이때의 봉기는 전라도 지방 밖으로 확대되지 못했고, 北接의 중앙교단은 봉기에 호응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서 조정은 淸國에 借兵(차병)을 요청했고, 이 요청에 따라 淸國이 군대를 파견하자 이에 맞서 日本도 군대를 파견했다. 日本의 군대 파견은 甲申政變 뒤에 맺어진 天津條約에 근거한 것이었으나, 淸國과의 전쟁을 오랫동안 준비해온 日本으로서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었다.
全琫準은 탐관오리의 처벌, 三政의 改革과 부당한 稅金徵收의 철폐, 外國 商人의 不法活動 금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27개조의 폐정개혁안을 兩湖招討使(양호초토사) 洪啓薰(홍계훈)에게 제시했다. 홍계훈이 농민군의 신변보장과 폐정개혁안을 임금에게 올리는 조건으로 개혁안을 받아들이자 농민군은 5월8일에 「全州和約」을 맺고 전주성에서 철수했다. 농민군은 약 4개월 동안 나주를 제외한 전라도의 모든 郡縣에 執綱所(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에 주력함으로써 역사상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농민 참여의 개혁정책을 실시했다.26)
그런데 이처럼 삼남지방에서 농민군이 크게 기세를 떨치고 있을 때에 昌洙를 포함한 황해도 지방 東學敎徒들이 어떻게 반응하고 활동했는지는 「백범일지」나 그밖의 자료에도 분명하지 않다.
1894년 가을에 이르러 崔琉鉉과 吳膺善은 교주 崔時亨으로부터 황해도 지역 동학교도들의 명단을 보고하라는 통첩을 받았다. 그들은 곧 崔時亨이 있는 보은을 방문할 대표 열다섯 명을 선정했는데, 이때에 昌洙도 그 열다섯 명 대표에 포함되었다. 어린 昌洙가 대표의 한 사람으로 선정된 것은 그만큼 布敎를 열심히 하여 많은 연비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昌洙는 길게 땋은 총각머리가 여행에 불편하기 때문에 갓을 쓰고, 연비들이 거두어 준 돈으로 노자를 마련했다. 그리고 그는 해주 특산물인 향먹을 선물로 준비했다.27)
黃海道 대표로 報恩 訪問
昌洙 일행은 海路와 陸路를 통해 忠淸道 報恩 帳內里에 도착했다. 동학의 성지인 장내리는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지방과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로서 삼남 지방 교도들이 집결하기에 유리한 지점이었다. 東學敎門의 중앙본부격인 六任所가 1884년에 이곳에 설치된 이래로 崔時亨이 계속 머물고 있었고, 주위 100리 안에는 崔時亨이 개척한 많은 비밀포교지들이 산재해 있었다.28)
동학교단 역사서인 「侍天敎歷史」는 황해도 대표들을 맞이한 崔時亨이 『북쪽의 교인은 어찌 이리 늦게 나타났느냐』고 크게 반기면서, 그 자리에서 崔琉鉉을 海西首 接主로 임명했다고 적고 있다.29) 崔時亨이 일행에게 했다는 『어찌 이리 늦게 나타났느냐』는 말은 전년에 있었던 보은취회에 황해도 교도들이 참가하지 않았던 사실을 지적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昌洙 일행이 보은을 방문했을 때의 상황은 「백범일지」에 더 자세하다. 마을 안에 들어서자 사방에서 주문 외우는 소리가 들렸다. 마을 한쪽으로는 사람들이 무리지어 나가고, 다른 한쪽으로는 무리지어 들어와 집집마다 사람들로 가득했다.
昌洙 일행은 안내인에게 열다섯 명의 명단을 주어 崔時亨에게 전하게 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고 나서 일행을 부른다는 연락이 왔다. 일행은 안내인을 따라 崔時亨이 거처하는 곳으로 들어갔다. 昌洙는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崔時亨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백범일지」는 이 때의 일과 관련하여 〈다른 사람들도 같은 생각이었겠지만, 내가 천리를 멀다 않고 보은에 간 것은 선생이 무슨 조화 주머니나 주지 않나 하는 기대와 선생의 道骨道風은 어떠한가 살펴보려는 생각이 간절했기 때문이다〉라고 솔직히 적었다.30) 그것은 1000여 명의 연비를 두고 「애기접주」라는 별명을 듣고 있던 이때까지도 실은 金九의 東學 敎義에 대한 이해나 믿음이 투철하지 못했음을 말해 준다.
昌洙는 崔時亨의 풍모를 유심히 관찰했다. 崔時亨은 나이가 예순 가까이 되어 보이고, 길게 늘어뜨린 수염은 보기 좋을 정도로 약간 검은 가닥이 있었다. 그는 얼굴은 맑고 야위었으며, 머리에 큰 검은 갓을 쓰고 저고리만 입고 앉아서 일을 보았다. 방문 앞에 놓인 무쇠 화로의 약탕관에서 나는 한약 달이는 냄새가 방 안에 가득했다. 그 약은 崔時亨이 먹는 獨蔘湯(독삼탕)이라고 했다.
昌洙 일행은 일제히 교주에게 절을 올렸다. 그러자 崔時亨도 윗몸을 구부려 손을 땅에 짚고 맞절을 했다. 그리고는 『멀리서 수고시레 왔소이다』하고 인사를 했다. 일행의 대표는 열다섯 명이 각각 만든 敎徒들의 명부를 崔時亨 앞에 올렸다. 崔時亨은 명부를 문서 책임자에게 맡기면서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崔時亨의 방 안팎에는 많은 제자들이 호위하고 있었다. 뒷날 東學 三世 敎祖가 되는 孫秉熙와 金演局(김연국) 두 사위와 유명한 朴寅浩(박인호) 등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김연국은 나이 사십 가까운 순박한 농군 같았고, 손병희는 젊은 청년으로서 지식이 있어 보였다. 그리고 「天乙天水」라는 부적을 쓴 것으로 보아 그는 글씨 재주도 있어 보였다.31)
全琫準의 제2차 蜂起 소식을 듣고
昌洙 일행이 장내리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 중대한 소식이 날아 들었다. 남도 지방의 각 관청에서 東學黨을 체포하여 학대하고 있는 반면에, 全琫準을 중심으로 한 南接의 동학농민군이 전면적인 再蜂起를 감행했다는 것이었다. 이때는 추수를 막 끝낸 9월 중순이었다.
日本軍은 마침내 1894년 6월21일 밤에 景福宮을 점령하고 이틀 뒤에는 淸日戰爭을 일으킴으로써 朝鮮은 淸國軍과 日本軍의 전쟁터가 되고 있었다. 예상 외로 일본군이 청국군을 쉽게 격파하고 金弘集을 영의정으로 하는 親日開化派 內閣을 발족시키자 농민군은 「斥洋斥倭」의 기치를 내걸고 다시 봉기를 감행한 것이었다. 1차 봉기의 목표가 反封建이었던 것에 비해 2차 봉기의 목표는 이처럼 反外勢였다.
東學農民軍의 2차 봉기에 직면하여 討伐軍은 봉기 참여 여부를 가리지 않고 동학교도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했다. 공주로 내려가는 京軍과 日本軍은 충청도 곳곳에서 동학교도들을 수색해서 학살했다. 각 郡縣마다 엄청난 희생자가 났다. 특히 동학농민군에게 피해를 입은 지방 유생들은 民保軍이라는 자체 토벌군을 조직하여 교도들에 대한 보복성 학살을 자행했다. 충청도 지방의 동학접주 辛在蓮(신재련)은 『선비의 무리들이 道人 한 사람 이상을 잡아오면 千金의 상을 준다고 하고는 체포 즉시 참수하니 그 피해가 막심하다』고 호소했다.32)
계속되는 동학교도의 피해로 말미암아 崔時亨을 비롯한 동학지도부는 큰 위기에 직면했다. 특히 토벌군 부대의 남진 방향에 위치한 京畿道의 龍仁, 安城, 長湖院 등지와 忠淸道의 鎭川, 槐山, 陰城 등지의 교도들은 토벌군에 쫓겨 남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토벌군에 밀리기 시작한 孫秉熙, 孫天民 등은 보은으로 집결하여 崔時亨에게 봉기할 것을 강력히 건의했다. 이 건의에 따라 崔時亨은 北接 산하의 전국 접주들을 충청도로 소집했다.
崔時亨은 동학교도의 학살 소식을 듣고 진노했다. 그는 순 경상도 말투로,
『호랑이가 물러 들어오면 가만히 앉아서 죽을까!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가서 싸우자!』33)
하고 말했다. 그의 이 말은 곧 動員令이었다. 결국 崔時亨은 9월18일에 北接 산하 모든 지도자들의 봉기를 촉구하는 기포령을 내렸다.34) 그것은 南接의 2차 起包(기포)에 대한 호응이었다.
각지에서 와서 대령하던 大接主들이 각자의 근거지로 가기 위해 썰물처럼 밀려 나가기 시작했다. 昌洙 일행 열다섯 명도 각각 「海月印」이 찍힌 접주 첩지를 받고 곧 보은을 출발했다. 갈 때에는 육로와 해로를 이용했으나 올 때에는 육로를 택했다.
돌아오는 길에 昌洙 일행은 여러 곳에서 긴장된 분위기를 목격했다. 길을 가는 도중 곳곳에서 흰옷을 입고 칼을 찬 동학농민군을 만났다.
충청북도 진천군 廣惠院 장터를 지날 때에 본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백범일지」는 적고 있다. 이곳에는 동학접주 신재련이 이끄는 1만 명의 농민군이 집결하여 대단한 기세를 과시하고 있었는데,35) 평소에 동학교도들을 학대하던 양반들이 잡혀 와서 길가에서 짚신을 삼고 있는 모습이 『가관이었다』는 것이다.
동학군은 陣營을 설치하고 행인들을 검사하고 있었다. 昌洙 일행은 증거를 보여주고 무사히 통과했다. 진영 부근 촌락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밥을 지어 道所로 나르고 있었다. 논에서 벼를 베던 농부들은 동학농민군이 몰려와 집결하는 것을 보고 놀라서 낫을 버리고 도망치기도 했다. 昌洙 일행이 서울을 지날 쯤에는 京軍이 삼남지방을 향하여 행군하고 있었다.36)
(3) 海州城 공략의 선봉장
黃海道의 동학농민군은 昌洙 일행이 海州로 돌아오기 이전에 이미 활동을 하고 있었다. 9월부터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던 農民軍은 10월 들어서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했다.37)
농민군이 처음으로 海州城을 공략한 것은 10월6일쯤이었는데, 이 공격을 주도한 것은 崔時亨의 북접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林宗鉉(임종현)을 중심으로 한 동학세력이었다.38) 이들은 먼저 康翎(강령) 관아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한 뒤에 바로 해주성을 공략했다. 이들 농민군은 거의 한 달 동안 해주성을 점령하고 있으면서 황해도 각 지역의 地方官을 임명하기까지 했다. 官軍이 압수한 농민군의 「都錄(도록)」에 따르면 林宗鉉은 스스로 黃海監司를 자임하고, 成載植(성재식)을 康翎 현감, 李容善을 안악 군수, 崔得秀를 海州 判官으로 임명했다. 그밖에도 이 「都錄」에는 中軍, 兵卒 등의 명단까지 기록되어 있었다.39) 산포수 800명이 東學軍에 가담하여 해주성의 軍器를 탈취하고 성문을 지켰고, 監司는 通引 집에 숨어서 朝廷에 보고도 못 했다.40)
昌洙 일행이 언제 해주로 돌아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백범일지」는 9월에 돌아왔다고 적고 있는데,41) 그랬다면 林宗鉉을 중심으로 한 동학농민군이 10월 초부터 한 달 동안이나 해주성을 점령하고 있었던 사실에 대하여 「백범일지」에 一言半句도 언급이 없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푸른 비단에 「八峯都所」 크게 써 걸고
해주에 도착한 昌洙 일행은 즉시 黃海道 地域 동학군 봉기문제를 논의했다고 한다. 황해도에서도 양반과 관리들의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은 혹심했다. 그런데다가 三南地方의 동학농민군으로부터 호응하여 봉기하라는 연락이 잇따라 도착했다. 그리하여 접주 열다섯 명은 회의를 열고 거사하기로 결정했다.42)
그런데 황해도의 東學農民軍도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순수한 동학교도들만으로 구성되지는 않았다. 동학농민군에는 봉건적 폐단으로 생활의 기반을 잃은 사람들이 많이 참가했다. 그리고 黃海道 農民軍에는 當五錢 때문에 피해를 입은 농민들과 일자리를 잃은 沙金 광부들이 많은 것이 특색이었다. 원래 당오전은 명목가치가 常平通寶의 5배로 정해져 있었으나 실제로는 2∼3배밖에 안 되는 조악한 화폐였고, 그나마 또 민간에서 불법으로 당오전을 위조하여 유통시키고 있어서 물가가 폭등했다. 특히 황해도 지역에서는 私鑄(사주)가 많이 행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文化에서는 私鑄에 관계하던 사람이 동학에 입도하기도 했다.43) 또한 1893년에 사금 채굴을 금지하자 먹고 살 길을 잃은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스스로 東學軍이라 칭하기도 했는데, 이들 사금 채집 광부가 농민군의 절반에 이를 정도였다.44)
10월까지 산발적으로 움직이던 황해도 동학농민군은 11월에 들어 숫자가 급증하여 도내 13개읍이 농민군의 습격을 받았다.45) 교단 역사서인 「天道敎創建史」는 林宗鉉, 吳膺善, 崔琉鉉 등의 지휘로 총 20명의 접주들이 9개 지역에서 대거 봉기했다고 적고 있는데,46) 그것은 남부와 서부지방을 중심으로 황해도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봉기했음을 뜻한다.
봉기의 중심지는 5개 接이 봉기한 海州였다.47) 崔琉鉉 휘하의 동학농민군은 총집결 장소를 포동 부근의 竹川 장터로 정하고 각지에 통문을 보냈다. 昌洙는 팔봉산 아래 산다고 해서 자신의 接 이름을 「八峯」이라고 지었다. 푸른 비단에 「八峯都所」 넉 자를 큼직하게 써서 걸고, 「斥洋斥倭」의 기치를 높이 내걸었다.
이처럼 昌洙가 봉기를 준비하느라 동분서주하던 때에 집에서 느닷없는 일이 벌어졌다. 어느 날 집에 들어가니까 淳永 내외는 술과 떡을 장만하고 昌洙의 혼인 준비를 하고 있었다. 淸日戰爭이 일어나자 나이찬 아들 딸을 둔 사람들은 자식들을 혼인시키는 것을 중요한 의무로 알고 혼사를 서둘렀는데, 淳永 내외도 이러한 움직임에 휩쓸린 것이었다. 이때에 昌洙의 나이는 열아홉 살이었다. 그리고 상대는 어릴 때에 집에 데려오기도 했던 예의 함지박 장수 金致景의 딸이었다. 昌洙는 한사코 장가를 들지 않겠다고 말했다. 아들의 단호한 태도에 淳永 내외도 단념하고 金致景에게 아들이 혼인을 절대로 원하지 않는다면서 그의 딸도 다른 집으로 출가시키라고 말했다. 金致景도 무방하게 생각했고, 따라서 淳永과 金致景이 취중에 했던 婚約은 없었던 일이 되었다.48)
昌洙의 接에 銃 가진 軍人이 제일 많아
崔琉鉉 휘하의 동학교도 간부들은 회의를 개최했다. 우선 동학 연비 중에서 무기 가진 사람들을 모집하여 군대를 편성하기로 했다. 昌洙는 본래 산골 출신인데다가 상민이었으므로 그의 상민 연비 중에는 산포수가 많았는데, 이들 산포수들은 자신들의 銃器를 가지고 있었다. 그밖에 인근 부잣집에서 약간의 護身用 武器를 거두어 오기도 하여 部隊 편성을 하고 보니까 昌洙의 接에는 총 가진 군인이 700여 명이나 되어 다른 어느 接보다 우세한 무력을 확보했다.49)
黃海道 農民軍은 대체로 두 가지 방법으로 무기를 조달하고 있었다. 첫째는 스스로 탄약고와 화약제련소 등의 武器製作所를 설치하여 자력으로 조달하는 방법이었다. 황해도는 무기제작에 필요한 납과 철 등이 많이 생산되는 지역이어서 일찍부터 광산개발이 성행했다. 그리하여 장연부에 灰汁取搾所(회즙취착소)를 만들어 火藥을 제조했고, 松禾(송화) 溫井에는 칼과 창을 만드는 제조소를 설치하여 무기를 만들었다.50)
다른 하나의 방법은 각 官衙의 武器庫를 습격하여 무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당시 日本軍이 〈관아에 있는 총기탄약이 적을 방지하는 무기가 아니라 적에게 공급되는 무기가 되었으니, 즉 관아는 적의 무기공급소였다〉라고 할 정도로51) 농민군의 무기고 습격은 빈번했다.
金昌洙의 산포수부대는 海州城 공략 農民軍의 주력 부대가 되었다. 본래 산포수들은 官砲로서 관에 등록되어 그 통제를 받았는데, 평소에는 농업에 종사하다가 유사시에 동원되는 직업적 성격을 띤 지방의 武裝組織이었다.52) 그런데 이들 산포수들은 농민군에만 참여한 것이 아니라 농민군 진압을 위한 토벌군의 주력부대로 참여하기도 했다. 산포수는 일정한 계급의식을 가진 동질적인 집단이라기보다는 전투에 대한 代價만 받게 되면 그 보수에 따라 농민군과 진압군의 어느 쪽에나 참여할 수 있는 용병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53)
11월 중순이 넘어가면서 각지에서 따로 따로 활동하던 동학농민군이 점차 해주성 주위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11월20일에 崔琉鉉 휘하의 동학농민군 5000명이 해주성 西門 쪽의 竹川 장터에 집결했다.54) 監司의 수기에는 이때에 집결한 농민군의 지휘자가 崔瑞玉이라고 했으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에 崔瑞玉은 崔琉鉉이었을 것이다. 같은 날 南門 쪽의 翠野(취야) 장터에도 수천 명의 동학농민군이 집결했는데,55) 이들 농민군은 아마도 林宗鉉 휘하의 동학농민군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흘 뒤인 23일 새벽에는 취야 장터의 농민군이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을 받아서 두 시간에 걸친 격전이 벌어지기도 했다.56) 황해도 동학농민군이 해주성 공략을 위해서 총집결한 것은 11월27일이었다. 昌洙도 산포수부대를 이끌고 竹川 장터로 나아갔다.
西門攻擊의 선봉장에 임명돼
황해도는 동학교단의 영향력이 크게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에57) 농민전쟁기에도 敎壇과 직접적인 연계가 없는 林宗鉉, 元容日 등의 세력과 교단의 지시를 받는 崔琉鉉, 吳膺善 등의 세력으로 나누어져 있었다.58) 그리하여 2차 해주성 공략을 위해 집결한 황해도 동학농민군은 하나의 지도체계에 따라 작전을 수행하지 못했는데, 이는 崔琉鉉 등의 동학농민군 지도부가 해주성 공략의 전략을 수립하는 데 중요한 한계였다.
농민군은 이처럼 죽천 장터와 취야 장터 두 방향을 중심으로 집결했는데, 장곡면 죽천은 信川, 長淵 방면에서 해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였고, 취야 장터는 甕津(옹진), 馬山 방면에서 해주로 들어오는 길과 長淵郡에서 두곡면을 지나 해주로 들어오는 큰 길이 서로 만나는 곳에 위치한 황해도 남부 일대의 가장 큰 상업과 교통의 중심지였다.59)
이날의 동학농민군의 해주성 공략 전투상황에 대해서는 「백범일지」와 함께 당시의 황해 감사 鄭顯奭(정현석)의 수기인 「甲午海營匪擾顚末(갑오해영비요전말)」과 농민군을 패퇴시킨 日本軍 將校 스즈키 아키라(鈴木彰)의 「東學黨征討略記(동학당정토약기)」의 세 가지 기록이 있는데,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점이 있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전투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최고회의에서는 海州城을 함락하여 貪官汚吏(탐관오리)와 日本人을 다 잡아 죽이기로 결정하고 昌洙를 先鋒으로 결정했다. 昌洙가 선봉으로 결정된 것은 나이는 어리지만 평소에 武學(곧 兵法)에 연구가 있었고, 또 昌洙의 接이 순전히 산포수로 무장된 정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의 이면에는 지도부가 자기들이 총알받이가 되는 것을 꺼려한 점도 있었다.60)
昌洙는 최고회의의 결정을 수락했다. 그는 말에 올라 「先鋒」이라는 사령기를 잡고 海州城으로 전진하는 농민군의 선두에 섰다. 농민군이 해주성 西門 밖 仙女山에 진을 친 다음 총지휘부는 총공격령을 내리면서 선봉인 昌洙에게 작전계획을 맡겼다. 昌洙는 다음과 같은 작전계획을 제의했다.
〈지금 城內에 京軍은 아직 도착하지 못했고 오합지졸로 편성된 守城軍 200여 명과 왜병 7명이 있다. 先發隊로 하여금 먼저 南門을 향하여 진격하게 하면 先鋒 휘하의 부대는 전력을 다하여 西門을 공략한다. 總所(總司令部)에서는 추세를 보아 아군이 취약한 곳을 응원한다〉61)
昌洙가 제의한 작전계획은 그대로 채택되었다. 이 때에 日本軍이 성 위에 올라가 試驗銃(공포) 네댓 발을 쏘았다. 南門으로 향하던 선발대가 놀라 도주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남문으로 나와 도주하는 군중에게 총을 연발했다.
昌洙는 全軍을 지휘하여 선두에 서서 西門에 도착하여 맹공을 가했다. 이때에 갑자기 總所에서 퇴각을 명령했고, 선봉대가 퇴각을 위해 머리를 돌리기도 전에 군중들은 산과 들로 도망했다. 昌洙가 도망하는 이유를 물으니까 南門 밖에서 서너 명이 총에 맞아 죽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昌洙의 부대도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62)
「백범일지」의 위와 같은 서술만으로는 이날의 전투 상황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기가 어려운데, 이 점에 대해서는 다른 두 기록이 참고가 된다.
우선 昌洙가 제안한 작전계획이 정보 부족에 의한 중대한 판단착오였던 것이 이날의 동학농민군의 해주성 공략이 실패하는 큰 원인이었다. 昌洙는 적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군이 성 밖으로 빠져나갔다고 생각하고 이때가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최적의 시점이라고 판단했던 것인데, 黃海監司 정현석은 日本軍이 빠져나간 틈을 타서 농민군의 총공세가 있을 것을 예측하고 은밀히 일본군을 성내에 진입시켜 놓고 있었다. 성내에 있던 일반 군졸들과 서리들도 모르게 新式火器로 무장한 일본군 40명이 비밀리에 東門을 통해 성내에 진입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城內의 병력은 日本軍 40명,63) 營砲 200여 명을 주력으로 하고 그밖에 監營에 소속된 각종 하급 서리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반면에 이날 해주성 공격에 직접 참가한 東學農民軍은 6, 7천명이었다. 그밖에 10리쯤 떨어진 곳에 1만명, 30리쯤 떨어진 취야 장터에 1만3, 4천명이 집결해 있어서 해주성 공략에 동원된 동학농민군은 무려 3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64) 그것은 과장된 숫자일 수 있을 것이나, 全琫準이 公州城공략을 위해서 동원한 농민군의 병력이 1만여 명이었던 점65)을 감안하면 해주성 공략에 동원된 농민군이 얼마나 큰 규모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다섯 時間에 걸친 大血戰
日本軍 쪽의 기록으로 보면 전투상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남문에 접근해 온 동학농민군 300여 명은 가까이에 있는 솔밭에 숨어서 일본군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그러나 서쪽의 동학군은 사격을 해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스즈키는 서쪽의 동학군에게는 총포가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40명의 병력을 둘로 나누어 20명은 성안에 남아서 남문 쪽의 동학농민군을 대응하게 하고, 자신은 나머지 20명을 이끌고 성 밖으로 나와 서문 쪽의 동학군에게 사격을 가했다고 한다. 그러자 서문 쪽의 동학군은 모두 도망했다는 것이다. 스즈키가 말하는 서문 쪽의 동학군이란 昌洙가 소속된 최유현 중심의 농민군 부대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군은 남문 쪽의 동학군에 대해 앞쪽과 옆쪽에서 사격을 가하여 4시간에 걸친 격전 끝에 퇴각시켰다. 일본군은 약 시오리쯤 더 추적했으나 농민군의 방향을 잡을 수 없었다. 이날의 접전은 공략이 시작될 때부터 약 5시간에 걸친 대혈전이었다.66)
감사의 수기에 따르면 이날의 전투에서 산포수 20명이 사망하고, 15명이 생포되었으며, 관군과 일본군의 인명 피해는 한 사람도 없었다.
아무튼 昌洙가 참여한 동학농민군의 제2차 해주성 공략은 이처럼 무참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패전의 결정적인 원인은 화력의 열세였다. 동학농민전쟁 당시에 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파견된 일본군이 소지했던 무기는 스나이더(Snider) 소총이었다. 스나이더 소총은 영국제 엔필드(Enfield) 소총을 개량해 만든 것으로서 1867년부터 사용되었는데, 최대 사정 거리가 1800m나 되었다.67) 그것에 비해 동학농민군이 사용한 화승총의 사정 거리는 100보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화승총은 격발 과정도 복잡했다. 그리하여 東學農民軍은 적을 빤히 쳐다보면서도 쏘지 못했다.68) 또한 화승총은 장마철이나 한겨울 추위에서는 발사할 수 없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는데,69) 농민군이 해주성을 공략한 것은 11월27일(양력 12월23일)이었으므로 그러한 화승총마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을 것이다.
화력뿐만 아니라 戰鬪力의 열세도 패전의 중요한 원인이었다. 동학농민군은 전투 경험이 거의 없었다. 농민군의 주력인 산포수부대는 해주성 공략을 앞두고 새로 조직된 부대였고, 昌洙 역시 총기 사용이나 전투 경험이 전혀 없었다.
呪術(주술)의 힘에만 의지하고자 한 東學敎徒들의 신앙도 문제였다. 1894년 9월부터 7개월 동안 황해도 서북지방에 머물면서 東學敎徒들의 활동을 목격했던 미국인 선교사 벙커(Mrs. A. E. Bunker)는 이들 동학교도들은 〈戰場에서는 적의 탄환도 물로 변해버린다〉고 믿고 있었고, 실제로 1월(양력) 어느 날에 이 지방의 首府(海州를 가리키는 듯)에서 처음으로 20~30명밖에 안 되는 日本軍과 싸운 수천 명의 동학군은 〈그들의 동료가 쓰러지는 것을 보자 지도자들에게 呪術을 쓰라고 소리쳤다는 말도 들었다〉고 적고 있는데,70) 이는 동학농민군의 제2차 해주성 공략 때의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4) 같은 東學軍의 기습받고 부대 괴멸
海州城에서 패퇴한 昌洙는 부대를 해주 서쪽에서 80리 떨어진 回鶴洞(회학동)의 郭監役(곽감역) 집에 집결시키기로 하고 선발대를 파견했다. 昌洙가 군사들을 마지막으로 수습하여 회학동에 도착해 보니까 무장 군인들은 흩어지지 않고 모두 모여 있었다. 郭監役이 어떤 사람이고 昌洙와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해주성 패전에 분개한 昌洙는 일단 병사들을 정돈시키고 나서 잘 훈련된 군대를 만들기에 주력했다. 그는 동학교도 여부를 가리지 않고 전투 경험이 있는 장교 경력자를 초빙하여 군사들에게 총술, 행군, 체조 등을 교련시켰다.
그러던 어느 날 초면의 두 사람이 昌洙에게 면회를 요청했다. 그들은 文化 九月山 아래 사는 鄭德鉉과 禹鍾瑞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두 사람은 昌洙보다 나이가 열 살은 더 많아 보였고, 식견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무엇을 하던 사람들이었는지는 「백범일지」에도 언급이 없다.
昌洙가 찾아온 이유를 묻자 그들은 태연하게 말했다.
『동학군이란 한 놈도 쓸 만한 것이 없는데, 그대가 좀 낫다는 말을 듣고 한 번 보고 싶어서 왔네』
이 소리를 듣고 같이 앉아 있던 昌洙의 연비들이 벌컥 화를 냈다. 동학을 비방하는 자니, 무례한 자니 하는 온갖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昌洙는 크게 화를 내며 『손님과 면담하는데 이렇게 무례한 것은 나를 돕는 것이 아니라 멸시하는 것이다』 하고 연비들의 무례함을 꾸짖고, 그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세 사람만 남자 昌洙는 예의를 갖추어 『선생들이 이렇게 먼 길을 오신 것은 저에게 좋은 계책을 가르쳐 주고자 하심이 아닙니까?』하고 말했다. 정덕현은 『내가 설혹 계책을 말하여도 듣고나 말른지, 그대가 실행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네. 요새 동학군 接主라는 자들이 호기 충천해서 선배를 무시하는 판인데, 그대도 그런 접주의 한 사람이 아닌가?』하고 반문했다. 昌洙는 더욱 공손한 말투로 『제가 다른 접주와 같은지 아닌지는 먼저 가르쳐 주신 뒤에 제가 실천하는 것을 보시고 나서 판단하시는 것이 어떠하십니까?』하고 말했다.
그제서야 鄭德鉉은 흔쾌히 昌洙와 악수를 하고 다음과 같은 계책을 말했다.
첫째, 軍紀正肅:병졸들이 서로 절하거나 경어 쓰는 것을 폐지할 것.
둘째, 民心을 얻을 것:東學黨이 총을 가지고 마을을 다니면서 곡식이나 돈을 빼앗는 강도와 같은 행위를 금지할 것.
셋째, 賢者를 초빙하는 글을 발포하여 經綸(경륜) 있는 인사를 많이 얻을 것.
넷째, 全軍을 九月山에 모아 訓練을 실시할 것.
다섯째, 載寧과 信川 두 군에 왜놈이 貿米 수천 석을 쌓아두었으니, 그것을 몰수하여 貝葉寺(패엽사)로 옮겨 양식에 충당할 것.
이 다섯 가지는 金昌洙 부대를 포함한 동학군의 공통적인 과제였다. 昌洙는 매우 기뻐하며 그것을 받아 들였다. 그리고는 당장 全軍을 소집하여 鄭德鉉은 謀主(모주)이고 禹鍾瑞는 從事(종사)라고 선언하고 두 사람에게 경례를 시켰다.71)
淸溪洞의 安泰勳進士가 密使 보내와
구월산으로 진을 옮길 준비에 분주하던 어느 날 밤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淸溪洞의 安泰勳(안태훈) 진사가 보낸 밀사였다. 「安重根血鬪記」에는 이때에 파견된 밀사가 安泰勳의 장남인 安重根이었다고 적혀 있으나72) 안중근의 자서전인 「安應七歷史」나 「백범일지」에는 그러한 언급이 없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이때의 밀사가 安重根이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백범일지」는 安泰勳의 인품에 대해 〈文章과 名筆이 해서지방은 물론이요, 경향에 널리 알려져 있고 智略을 겸비하여 당시 조정 대관들도 정중히 대접하는 이로서〉라고 적고 있는데,73) 그 당시에 昌洙가 安泰勳에 대해 이렇게 자세히 알고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安泰勳은 동학군이 봉기하자 청계동 자기 집에 義旅所(의려소)를 설치하고 그의 동생과 아들들로 하여금 병사를 담당하게 하면서 격문을 뿌려 산포수 70여 명과 장정 100여 명을 모아 부대를 조직했다.74) 그는 서울의 어느 대신의 원조 아래 黃海監司와 긴밀히 연락하면서 동학농민군 토벌에 나서서 信川지방의 농민군 토벌에 큰 성과를 거두었고, 11월에는 元容日 부대 2000여 명을 대파하기도 했다.75) 그리하여 황해도 동학군은 안태훈 부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또 동학농민군이 해주성을 공략했을 때에 감사의 요청으로 안태훈이 지원군을 보냈다는 주장도 있으나,76) 이는 확실하지 않다. 그런데 天峰山 너머 청계동은 金昌洙 부대가 머물고 있는 회학동과는 20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따라서 昌洙도 항상 청계동 쪽을 경계하고 있던 참이었다.
정덕현은 밀사를 만나 보고 나서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안태훈은 비밀리에 昌洙를 조사하고 난 뒤에 〈군이 젊고 대담한 인품을 지닌 것을 사랑하여 토벌하지 않을 터이지만, 군이 만일 청계를 침범하다가 패멸당하게 되면 人材가 아깝다〉는 후의에서 밀사를 보냈다는 것이었다.77)
安泰勳이 밀사를 보낸 것은 서로 있을 수 있는 피해를 사전에 막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동학군 중에서 規律과 訓練이 비교적 잘된 金昌洙 부대와 바로 가까이에서 대치하고 있는 것은 안태훈으로서도 은근히 불안한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안태훈은 일본 토벌군의 면담 요청을 거절할 정도로78) 義氣가 강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昌洙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 있었다는 말도 거짓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뒤이어 안태훈이 昌洙에게 피신처를 제공해 주기까지 하는 점으로 미루어 보면 그의 행동은 신임 감사로 부임한 趙熙日(조희일)의 동학군 진압책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11월30일에 해주에 도착한 趙熙日은 일본군의 혹독한 농민군 진압책에 반대하여 적극적인 說諭策(설유책)을 폈다.79) 그는 平山府使가 자신의 지시를 어기고 동학군을 토벌하는 데 주력한다는 이유로 파면시켰다.80)
조희일의 설유책은 효과를 발휘했다. 昌洙를 동학에 입도시킨 吳膺善과 崔琉鉉 등이 황해감사에게 올린 소장에서 신임 감사의 설득에 감화되어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영구히 양민으로 돌아가겠다고 한 것이나,81) 林宗鉉을 狀頭로 올린 소장에서 조희일의 설유에 응하고 자신들이 지닌 무기를 水營에 반납하겠다고 한 것82)은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안태훈이 밀사를 파견했기 때문에 昌洙는 이 문제를 신중히 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모회의를 소집한 결과 이를 수락하기로 하고 다음과 같은 밀약을 체결했다.
〈나를 치지 않으면 나도 치지 않는다. 양쪽 중에 어느 한쪽이 불행에 빠지면 서로 돕는다.〉83)
동학농민군과 토벌군이 이러한 밀약을 맺었다는 것은 매우 의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밀약대로라면 만일에 동학농민군이 함께 청계동을 공략하는 경우에는 昌洙는 같은 동학농민군과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 가능성은 희박했으므로 이 밀약은 昌洙가 관군이나 일본군 등 다른 토벌군에 의하여 위험한 처지에 빠질 경우에 안태훈이 監營 등에 작용하여 昌洙를 구원하겠다는 약속의 성격이 더 강한 것이었을 것이다.
九月山 貝葉寺로 부대 옮겨
패엽사로 부대를 이동한 昌洙는 절 입구에 초소를 지어 군사들의 산 밖 출입을 엄금했다. 그는 長期戰에 대비하여 軍糧米 확보에 나섰다. 먼저 文化 東山坪에 일본인이 쌓아 둔 쌀을 빼앗아 패엽사로 옮겼다. 쌀을 몰수해 놓고 산 아랫마을에 쌀 한 섬을 져오면 서 말을 준다고 고지하자 그 많은 쌀을 하루 만에 모두 옮길 수 있었다. 그리하여 40석은 운반 경비로 사용되고 나머지 110석을 패엽사로 옮겼다.84) 그런데 「백범일지」에는 이때에 몰수한 군량미가 백미 1000여 석이라고 했으나85) 이는 착오이다.
昌洙는 軍律을 강화하여 동학군으로서 민가에 피해를 주는 무리를 엄격하게 다스렸다. 각 마을마다 〈동학을 빙자하여 돈을 강제로 빼앗거나 행패를 부리는 무리가 있으면 즉각 보고하라〉고 고지하고, 이 훈령에 따라 고발되면 체포하여 무기를 가진 사람은 무기를 빼앗고 곤장과 태장을 가했다. 그러자 금방 사방이 평안해지고 민심이 안정되었다.
九月山에서 昌洙가 가장 역점을 두어 시행한 것은 사격훈련 등의 軍事調練과 널리 人材를 구하는 것이었다. 昌洙는 현인을 초빙하는 글을 포고하고 또 구월산 주위에 평판 있는 인사를 조사하여 혼자 직접 걸어서 찾아가기도 했다. 그리하여 신천군 月精洞의 宋宗鎬(송종호)를 모셔와 자문을 받기도 하고, 豊川郡의 許坤(허곤)이라는 명사가 찾아와서 합류하기도 했다.
송종호는 初試(초시)에 합격한 사람으로서 일찍이 上海 등지를 다녀와서 해외 사정에도 정통했고 사람됨이 걸출하여 영웅의 기풍이 있었다.86) 허곤은 문필이 뛰어나고 사무에 밝은 사람이었다. 우종서, 송종호, 허곤은 이때에 맺은 인연으로 뒷날 金九가 장련지방을 중심으로 新교육운동을 추진할 때에 동지로서 再결합하게 된다.87) 특히 우종서는 뒷날 金九를 기독교에 입교시키는 장본인이라는 점에서 이때의 이들의 만남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패엽사에는 道僧으로 명성이 높은 주지 荷隱堂(하은당)과 그 제자 등 수백 명의 남녀 승도가 있었는데, 昌洙는 이따금 하은당으로부터 설법을 들었다.88)
李東燁 부대와의 갈등
구월산 주변에 진을 친 부대는 金昌洙 부대 말고도 여러 부대가 있었다. 그 중에는 李東燁이라는 접주가 이끄는 부대가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李東燁은 앞서 해주성을 점령했던 林宗鉉으로부터 文化 接主에 임명되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같은 동학군이면서도 金昌洙 부대와 李東燁 부대는 알력이 심했다. 李東燁 부대는 천민 출신이 대부분이었고, 그들은 동학의 이념이나 사회개혁의 의지보다는 관아를 쳐부수고 관리들을 굴복시키는 데서 심리적 쾌감을 느낄 뿐이었다는 기술도 있다.89)
李東燁 부대의 군사들이 패엽사 부근 마을을 노략질하다가 金昌洙 부대원에게 잡혀 총기를 빼앗기고 벌을 받은 뒤에 풀려나기도 했다. 그런데 昌洙의 부하 가운데 마을로 내려가 재물을 약탈하다가 발각되어 엄한 형벌을 받고는 도망가서 李東燁의 부하가 되거나 아예 노략질을 하고 싶어서 밤중에 도망하여 이동엽의 부하가 되는 자들이 생겨났다. 이렇게 되자 金昌洙 부대는 점점 세력이 약해졌다.
이 무렵에 昌洙의 신상에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 그것은 최고회의에서 昌洙의 東學接主의 감투를 벗기기로 결정한 것이었다.90) 그런데 이러한 중요한 사실에 대해 「백범일지」에 구체적인 설명이 없는 것은 적이 의아스러운 일이다. 이때의 최고회의란 황해도 지방의 東學指導部를 가리키는 것이거나, 아니면 패엽사 주변에 진을 친 농민군 부대 지휘자들의 연석회의 같은 것을 뜻하는 것 같다.
「백범일지」는 이때의 최고회의의 조치가 〈나에게서 兵權을 박탈하자는 야심이 아니요, 나로 하여금 몸을 보전하게 하려는 방책이었다〉고 적고 있는데,91) 그러한 조치가 어떻게 자신의 몸을 보전하게 하는 방책이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許坤을 평양에 파견하여 張好民의 소개를 받아 黃州兵使의 양해를 얻은 다음 패엽사에 있는 부대를 허곤에게 인도하게 한다는 것이었다.92)
「兵使」란 지방 관군의 兵權을 장악하는 兵馬節度使를 가리키는 말인데,93) 평양에 있던 장호민이 누구이며 그의 소개로 황주병사의 양해를 얻어 부대를 허곤에게 넘겨 준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崔琉鉉, 林宗鉉 등 황해도 동학농민군 지휘부가 감사의 선무책에 순응하겠다는 단자를 보낸 것도 이 무렵이었던 것 같은데,94) 金昌洙 부대의 경우도 그러한 상황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아무튼 이 결정에 따라 허곤은 송종호의 편지를 지니고 평양으로 출발했다고 한다.
南部地方의 農民戰爭은 막을 내리고
1894년 12월2일에 농민전쟁의 최고 지도자였던 全琫準과 金開南이 체포됨으로써 치열했던 남부지방의 농민전쟁은 막을 내렸다. 해주성 공략 이후로도 토벌군과 산발적인 전투를 계속하던 황해도 지방의 동학농민군도 12월 중순을 넘어서면서는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官軍과 日本軍은 해주성을 거점으로 하여 주위의 동학농민군을 소탕해 나갔다. 서쪽의 옹진, 강령 방면의 농민군을 소탕한 토벌군이 북쪽을 향해 鶴嶺을 넘어온다는 소식도 들렸다. 그러한 상황에서 金昌洙 부대는 어처구니없게도 토벌군이 아니라 같은 동학군인 李東燁 부대의 기습공격으로 괴멸되고 만다.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는 1894년 12월이었다. 昌洙는 신열과 두통이 심하여 며칠 동안 꼼짝 못 하고 방에 누워 있었다. 하은당이 문병와서 살펴보고는 말했다.
『홍역도 치르지 못한 대장이로구려』
하은당은 火砲領將(화포영장) 李龍善에게 昌洙의 방에 사람들이 일체 출입하지 못하게 하고는 자신이 직접 치료를 전담하고 홍역에 경험이 있는 나이 든 女僧으로 하여금 간병하게 했다. 그런데 「백범일지」에 따르면 金九는 서너 살 때에 이미 홍역을 앓았으므로 이때의 병은 홍역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李東燁이 全부대를 이끌고 습격해 온다는 급보가 날아들었다. 보고가 끝나자마자 李東燁의 군사들이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며 절 안으로 들이닥쳤다. 순식간에 절 안은 양쪽 군사들의 육박전으로 소란해졌다. 수적으로 열세인 昌洙 부대는 제대로 저항하지도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이무렵 임종현은 문화 달천에 머물고 있었는데,95) 이동엽 부대는 임종현의 휘하에 있었으므로 金昌洙 부대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李東燁이 호령했다.
『金접주에게 손대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이러한 李東燁의 호령에 대해 金九는〈그것은 李東燁이 나를 미워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나를 박해하면 뒷날 큰 화를 입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라고 적고 있다.96) 왜냐하면 昌洙 자신은 崔時亨으로부터 직접 接主 첩지를 받은 東學의 正統인 반면에 李東燁은 임시방편으로 임종현으로부터 첩지를 받은 말하자면 「2세 접주」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벌거벗은 몸으로 통곡하는 敗將
金昌洙 부대를 격파한 이동엽은 화포영장 이용선만을 사형에 처하라고 했다. 격분한 昌洙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 큰 소리로 외쳤다.
『이용선은 나의 지휘 명령에 따라 행동한 것뿐이다. 이용선이 죽을 죄가 있다면 그것은 곧 나의 죄이니 나를 총살하라』
그러나 昌洙의 노호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李東燁은 부하에게 명하여 昌洙의 손발을 꽉 껴안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는 이용선만 끌고 나갔다. 잠시 뒤에 마을 어귀에서 총소리가 났다. 뒤이어 이동엽 부대는 퇴각하고, 이용선이 총살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昌洙는 황급히 마을 어귀로 달려갔다. 과연 이용선은 총에 맞아 죽었고, 그가 입었던 옷은 불타고 있었다. 昌洙는 이용선의 머리를 부둥켜안고 통곡했다. 한참 울다가 자기 저고리를 벗어 이용선의 머리를 감싸 주었다. 그 저고리는 昌洙가 동학접주가 되어 지도자 노릇을 한다고 하여 어머니 곽씨 부인이 지어 보낸 생전 처음 입어 본 명주저고리였다.
昌洙는 마을 사람들을 시켜서 이용선의 시신을 거두어 정성껏 묻어 주게 했다. 昌洙가 눈 속에서 벌거벗은 몸으로 통곡하는 모습을 보다 못한 마을 사람들이 그에게 옷을 가져다 주었다. 이용선은 함경도 定平 사람으로서, 장사하러 황해도에 와서 살고 있었다. 그는 사냥하는 총술이 있고 무식한 대로 사람을 다스리는 재주가 있어서 昌洙는 그를 화포영장에 임명했었다.97)
이동엽 부대는 퇴각하면서 金昌洙 부대가 비축해 둔 군량미를 전부 가지고 가버렸다. 동학농민군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군량미 확보였다. 그들은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해서 政府와 富豪의 곡식을 탈취하거나 半강제적으로 헌납받았다. 昌洙도 군량미 조달을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었다. 구월산으로 부대를 옮길 때에 일본인이 東山平에 쌓아둔 다량의 쌀을 빼앗은 것은 앞에서 본 대로이다.
그밖에도 그는 해주 檢丹坊(검단방)의 朴泓錫(박홍석)이 쌓아 둔 벼 200석을 빼앗아 송화 접주 方元仲과 나눈 적이 있고, 석담의 李참판 집에서는 돈 250냥을 빼앗기도 했었다.98) 따라서 金昌洙 부대는 군량미를 비교적 넉넉히 확보해 둔 상태였을 것이다. 뒷날 昌洙는 동산평에서 옮겨 온 쌀 110석 모두를 李東燁에게 빼앗겼다고 진술하고 있다.99)
그런데 이러한 李東燁 부대의 기습은 단순히 金昌洙 부대와 李東燁 부대의 알력 때문에 감행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알력까지 포함하여 앞에서 본 이른바 최고회의의 결정, 곧 昌洙의 동학 접주직을 거두는 조치와 관련이 있는 것이나 아닌지 생각해 볼 만하다. 昌洙가 官軍이나 日本軍에 적극적으로 대항하기보다는 오히려 토벌군인 安泰勳과 모호한 관계를 갖는 점 등이 최고회의에서 문제가 되었을 수 있고,100) 또 李東燁 부대는 어쩌면 그러한 최고회의 쪽과 연계되어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昌洙는 그날 밤으로 缶山洞(부산동)의 鄭德鉉 집으로 피신했다. 정덕현에게 그 동안의 사정을 상세히 설명하고 복수할 결의를 말했다. 그러나 정덕현은 만류했다.
『이용선의 죽음은 불행한 일이오. 그러나 형은 더 큰 일을 해야 할 장부이외다. 울분을 참으시오. 며칠 동안 홍역을 치료한 뒤에 나와 함께 풍진을 피하여 유람이나 떠납시다』
『아니오. 이용선의 복수를 해야 합니다』
『복수는 의리상 당연한 일이지요.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어요. 京軍과 日本軍이 여태 구월산을 공격하지 못한 것은 산 밖 이동엽 부대의 세력이 크고 또한 패엽사의 우리 부대도 험한 산세에 의거하고 있고 비교적 정예부대라고 듣고 있기 때문이오. 이제 두 부대의 싸움 소식을 들은 경군과 일본군은 곧바로 이동엽 부대를 섬멸하고 패엽사를 점령할 것이오. 그러니 복수를 말할 여지가 없어요』
鄭德鉉의 판단은 옳았다. 昌洙는 정덕현의 집에서 며칠 동안 요양하다가 장연군 夢今浦(몽금포) 부근의 마을로 피신했다.101)
『바람 잡듯 헛된 일이었다』
昌洙가 몽금포에 피신하고 있는 동안에도 황해도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이처럼 해를 넘겨서도 황해도 지역 농민군의 활동이 수그러들지 않자 조정에서는 대대적인 討伐에 나섰다. 3월에는 江華兵이 파견되어 이미 파견된 일본군과 연합하여 농민군을 토벌했다. 그리하여 농민군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昌洙는 李東燁이 잡혀가 사형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한 각 군의 동학농민군도 저항 끝에 거의 패퇴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이런 소식을 들으면서 昌洙는 몽금포에서 석 달 동안 은거하고 있었다. 나는 새도 출입하기 어려운 마을이라는 몽금포 부근의 작은 마을에서 동학군의 잇따른 패전 소식을 들으면서 그 역시 패퇴한 「애기접주」 昌洙의 심경이 어떠했는지는 그의 「백범일지」에도 언급이 없다. 새로운 흥분과 희망으로 東學에 입도한 지 이태 만에 느낀 것은 또 하나의 커다란 좌절감이었을 것이다. 그 좌절감이 과거에 낙방했을 때나 관상책을 읽고 나서 느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했던 것은 뒤이어 淸溪洞에 머물 때의 자신의 심경이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고 한 「백범일지」의 솔직한 술회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먼저 科擧場에서 비관적인 생각을 품었다가 희망을 觀相書 공부로 옮겼고, 나 자신의 관상이 너무도 못생긴 것을 슬퍼하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리라는 결심을 했었다. 그러나 마음 좋은 사람이 되는 방법 또한 묘연하던 차에 東學黨의 수양을 받아 新국가 新국민을 꿈꾸었으나, 이제 와서 보면 그도 역시 바람 잡듯 헛된 일이었다.〉102)
이러한 감회는 東學의 교의에 대한 실망보다도 왕조의 교체와 평등사회의 도래에 따른 새로운 身分 상승의 기대가 무산된 데 대한 실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때의 일 이후로는 「백범일지」에 동학에 대한 언급이 일체 없다.
安泰勳 찾아 淸溪洞으로
그러나 동학과 동학농민전쟁이 「바람잡듯 헛된 일」이 아니었음은 그 뒤의 이 나라의 역사가 웅변으로 말해 준다. 다만 金九의 이러한 처절한 술회는 그 뒤의 그의 社會活動과 관련하여 중요한 참고가 된다. 그것은 그토록 치열한 戰鬪經驗에도 불구하고 동학의 교의가 그의 價値觀으로서 확고하게 뿌리를 내린 것은 아니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八峯都所에 높이 내걸었던 「斥洋斥倭」의 창의 구호는 淸溪洞에서 만난 유학자 高能善의 훈도를 통하여 衛正斥邪思想으로 내면화되었다가 그뒤에 金九가 開化論者로 바뀌면서 自己否定된다. 그러나 그 「斥倭」의 정서는 그러한 사상적 전환이 있고 난 뒤에도 新교육운동과 감옥생활과 오랜 독립운동 기간을 통하여 金九로 하여금 抵抗的 民族主義의 표상이 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昌洙는 1895년 2월에 鄭德鉉과 함께 몽금포를 떠나 텃골 집으로 돌아갔다. 淸日戰爭은 끝이 나고 동학농민군의 봉기도 진압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위험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日本軍이 죽천 장터에 진을 치고 농민군을 수색하고 있었다. 淳永 내외는 매우 불안해 하며 昌洙에게 차라리 멀리 떠나 피신하기를 권했다. 그러나 패전의 장수가 찾아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鄭德鉉은 궁여지책으로 청계동 安泰勳을 찾아가 보자고 했다. 昌洙는 주저했다. 안태훈이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패전의 장수인 자신이 포로 같은 대우를 받는다면 평생 후회될 것이 염려되었다. 그러나 정덕현은 『안진사가 밀사를 파견한 진의는 군사적인 원조나 계략이라기보다는 나이 어린 형의 담대한 기개를 아낀 것이니 염려 말고 같이 갑시다』 하고 昌洙를 설득했다. 달리 어떤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昌洙는 청계동을 찾아가기로 결심했다.103)
李承晩의 東學批判
그런데 王室과 朝廷에 대하여 강한 불만과 저항감을 느끼면서도 科擧 말고는 달리 진로를 찾지 못하고 계속 書堂에 나가면서 고뇌하고 있던 궁색한 젊은 儒生 李承晩이 東學과 東學農民戰爭에 대하여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李承晩 자신의 자서전 초고나 전기들에는 이때의 일과 관련하여 전혀 언급이 없다.
李承晩은 동학농민전쟁이 전국을 휩쓴 바로 그해 늦가을부터 新學問을 배워 開化運動의 급진 과격파로 활동하게 되는데, 이때의 李承晩은 東學運動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뒤에 옥중에서 쓴 「청일전기」에서 동학농민군의 봉기가 탐관오리들의 핍박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만일 격분하여 일어날진대 법을 범치 말며 경계를 잃지 말고 옳은 도리로 종용히 조처하려 할진대 정부에서 부득불 전국 민심을 따라 준행하여 주었을지니 전국에 큰 이가 되었을 것이어늘, 이름을 동학이라 하고 어리석게 정감록에 무슨 말이 있다, 혹 무슨 신장을 부린다 하여 천하고 무식한 말을 믿고 도처에 소요하여 필경 난민이 되고 말았으니, 이는 다만 내 나라에만 득죄함이 아니라 세상에 큰 죄인들이 됨이라.
기왕 일은 다 어두워서 모르고 그러하였거니와 한 번 경력한 후에는 저마다 짐작할 만하거늘, 들으니 지금도 어리석은 백성들이 종시 요사한 말을 믿고 작당하여 기도를 한다 하며 부적을 써서 민심을 현혹케 하는 자가 있다 하니, 저의 어리석은 것은 이루 말할 수 없거니와 나라를 위하여 대단 위태히 여기노라.〉104)
그리고 또 옥중에서 쓴 다른 글에서는〈한국의 東匪(동비:동학당)나 淸나라의 義和團은 모두 서양을 배척하고 옛날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내세워 義擧라고 표방하며 천하에 웃음거리를 남기고 스스로 패망을 자초하였다〉105)라고 혹평했다.
東學과 東學農民戰爭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李承晩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開化派들의 공통된 것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우리는 李承晩이 어떻게 培材學堂에 들어가서 新學問을 익히고 급진적인 開化派가 되는가를 다음호에서 살펴보기로 한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