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인연을 만나 10여년 해설사를 하다 보니 강화를 여러 번 답사를 했다.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에서 남한산성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시키려는 노력 덕분인지 올 들어 해설이 몰려 쉴 짬이 없었다. 가기 싫어 꾀가 났지만 그래 또 가보자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마음으로 아침 일찍 서둘러 버스에 올라 가다보니 어느새 강화대교다. 산에서만 살다가 바다를 보니 마음이 타~악 트이는 기분이다.
강화 사람들은 강화를 보장지처, 인후지지의 땅,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고 한다. 먼저 올 때는 역사관이 이곳에 있었는데 다른 곳으로 가고 없다. 세계문화유산 강화고인돌 옆으로 옮겨 많은 것을 볼 수 없었다. 나를 먼저 맞이한 것은 많은 비석 군이다서양보다 200년 앞서 최의가 상정한 “금속활자 중흥기념비”가 보인다. 유수부가 있던 곳이라“수령 이하 개 하마비”가 있고 특히 남한산성과 관련된 정제두와 청백리 이시백의 비도 보이고 “방생 축자 장 일백, 회자 장 팔십”라고 그 시절에도 가축을 놓아기르거나 재를 함부로 버리면 곤장을 맞은 “금표”비도 보였다.
만나기로 한 예정시간보다 늦게 강화도 해설사를 만나 갑곶돈대에 오르려니 천연기념물 78호인 400년 된 탱자나무가 많은 애기가 있는지 나를 반긴다. 전라도에서 가져다 적을 막기 위해 해안가로 쭉 둘러 심었고 북방 한계선으로 더 위쪽에서는 살지 않는다고 한다.위리안치라는 벌이 생각난다. 광해는 제주도로 유배가고 아들 질은 부인과 강화로 유배를 왔는데 친정에서 보내온 인두와 다림이 자루로 밤에 몰래 바닥을 파 하인들은 귀신 소리가 난다고 귀를 의심하고 몇 달에 걸쳐 겨우 울타리 밖이라 사약을 받고 죽지 않았던가, 권력이 뭔지...갑곶은 강화를 건너는 갑문이었고 5진7보53돈대9개의포가 있다.해안이 리아스식이라 적을 막기 용이해서 였을 것이다. 삼남사람들이 염화바다를 통과 양화진 마포나루까지 닿았던 교통의 요충지였고 1866~1876까지 십년동안 많은 전쟁에 신음과시체가 쌓였으며 전쟁을 하면서 포도 많지 않았고 잘 터지지 않아 별 효력도 없었다.병인양요 때는 문수산성에서 갑곶으로 포격 점령하고 고려궁지를 35일간 점령하였다.
병자호란 때는 수천 명의 목이 잘려나가 나문 재라는 풀의 색이 원래 파란색이었는데 피로 빨갛게 물들어 붉은 색이 되었다고 하고 김경징에게 한이 맺혀 경징이풀 이라고도 한다. 바쁜 일정이기에 서둘러 고려궁지로 향했다. “황성옛터 ”한 자락을 부르며 들어가서 본 쓸쓸한 옛 궁터에는 꽃은 다 지고 옛터만 남아 있었다. 1232년 고려 고종은 몽고의 침입을 피해 피난을 와서 살았으며 지금은 삼분의 일로 축소되었고 280년 전에 지은 군수 집무실인 “명위원”은 영조 때 정제두의 사위인 백하 윤순이 썼는데 특이한 것은 육방이 아니고 사방밖에 없었다.
숙종 때 주합루 이었고 병인양요가 일어나기 8년 전에 정조임금이 외규장각을 만들었다. 1978년 서지학자 박병선 박사가 297권을 발굴해 공개하면서 알려졌다.하지만 병인양요가 일어나 프랑스가 약탈한 도서 중 유일본 8본을 포함한 1차 반환 분 75권이 145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영구임대 계약으로 미테랑과 김영삼 전 대통령이 등가교류조건 이야기로 시작되어 지난해 “G20서울 정상회의” 기간 중 양국 대통령이 5년 단위로 갱신이 가능한 임대방식이다. 원래 내 것이었는데 우스운 일이다. 다 돌아왔기 때문에 도서를 싣고 우선 강화를 돌고 서울대에 보관한다고 한다. 의궤나 반차도의 물감이 청금석과 홍화씨로 했다는 것도 알았다. 남문에 있었던 강화 동종은 무거워 프랑스로 가져가지 못해 궁 한 켠에 제 할 일을 잃어 묵묵히 자리하고 있다. 두 줄의 띠가 있으며 배둘레햄처럼 불룩하고 밤에는 스물여덟, 밤에는 서른세 번을 친다.음각, 양각으로 시주한 사람의 이름이 많이 적혀 있고 언제 이 종소리가 나는 날이 있을까? 다음에 가는 분들은 궁아래 있는 이방 관아지를 가보기 바란다.옛 집에 앉아 쉬어가는 여유도 있을테니까. 궁을 뒤로 하고 병자호란 때 강화 함락되자 손자와 성 남문에서 순절한 “선원 김상용의 순절비”도 보고 강화도령 철종의 잠저인 용흥궁과 사적인 강화 성공회성당은 뒤로하고 광성보로 갔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점심을 맛있게 먹고 아이들의 산 역사의 교육현장 목적으로 복원된 광성보는 3개의 돈대가 있고 3개내지 5개의 포좌가 있으며 신미양요의 격전지로 대포는 있지만 사정거리가 700m라 그다지 큰 효력은 없었을 것 같다. “광성파수순절비”와 이천에 생가가 있는 어제연, 어제순 형제의“쌍절비각”비, 59명이 묻힌 무덤이 7기가 있는데 한 기당 7~8명이 묻혀 있고 음력4월24일 제를 지낸다고 한다. 정묘호란 때 인조가 염화강을 건너야 하는데 그 곳은 긴 돌이 많아 물살이 세어 손돌이 가르쳐 주는 것이 거짓인줄 알고 죽이려 할 때 손돌이 바가지를 주며 이것을 띄워 가는대로 하라고 하고 결국은 죽임을 당하고 무사히 건넌 인조는 후회하고 강 건너 편에 무덤을 만들어줬지만 말없이 흐르는 물살을 보며 지금이라면 무슨 얘기를 할까? 전등사를 오르는데 애기똥풀, 이름 모를 새소리, 청량한 나무냄새 등이 기분이 한결 가벼웠다. 소수림왕 때 아도화상이 건립했다고 하는데 900년 뒤 충열왕 부인 정화궁주가 옥등을 하사했다고 하고 백제 땅이었다고도 하고 뭔가 잘 안 맞는 것 같다. 원래 진종사였으며 부마국이 된 고려 정화궁주의 한이 서린 곳이다. 기록상 이 사찰이 가장 오래 된 절이라고 한다. 기둥은 배흘림기둥이고 창살은 싸리나무로 아름다우며 약사전의 처마길이가 아주 길다.
절을 지을 때 대목수와 잡부들이 한조를 만들어 들어오는데 어쩌다 몰래 밖을 나가 술집 작부에 홀려 절집공사를 소홀히 하자 스님이 몰래 다른 곳으로 빼돌려 알지도 못하는 대목수는 화가 나 네 귀퉁이에 여인의 나부 상을 만들어 달고 네 이년! 너는 평생 무거운 것을 이고 살라고 했다지만 자세히 보면 원숭이 얼굴 같기도 하고 오른손, 왼손 한손으로 인상을 쓰고 받치고 있는 모습이 우리네 조상들의 해학이 묻어나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단기51년 참성단을 마니산에 쌓고 세 아들 부여, 부소, 부우에게 성을 쌓아 삼랑성이라고 하고 산 봉오리가 솥 다리 세 개처럼 생겨 정족산성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부뚜막도 있었다고 한다.
1866년 병인양요 때 문수산성에서 갑곶으로 포격하고 양헌수장군은 산성으로 들어와 프랑스 군을 맞아 싸워 사고를 지켰다. 그때 프랑스군은 조선에 봄 소풍 오듯 들어왔다고 한다. 조선의 종과 중국의종 비교 할 수 있었는데 중국 종에는 건곤감리와 밑에 곡선의 팔랑이가 있다. 정족산 사고는 조선시대 사고 중 하나다. 유서 깊은 강화답사! 몇 번을 가도 볼거리가 많은 곳, 인조와 청나라와 정묘호란 때 강화조약 맺은 곳 연미정, 교동 영창대군의유배지 등 아쉬움을 뒤로 하고 발길을 돌리며 누가 그랬던가? 역사는 독립이다. 지난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고 매도하지 않는 마음이야 말로 애국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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