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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광주의 깊은 숨결 속으로-홍민자 해설사님의 글

홍미인 2017. 10. 25. 15:28
‘광주의 깊은 숨결 속으로’
2008-01-15 14:27:35 기사돌려보기 인쇄하기
평소 존경하는 향토 연구소 박광운 소장님이 해설사 교육을 시켜주신다고 하시고, 남재호 부원장님도 동참하신 것을 보고 고마운 마음을 안고 우리 일행은 출발을 했다.

첫 코스로 광주 8경중 하나인 ‘앵자봉’ 자락에 자리 잡은 천진암으로 갔다. 앵자봉은 꾀꼬리가 알을 품고 있다는 뜻을 지닌 봉우리이다. 부부가 같이 등산을 하면 금술이 좋아진다는 전설도 있다. 그리고 소가 누워 있는 형상과 같다 해서 ‘우산리’라는 지명이 있다. 천진암에는 철분이 많이 함유된 소미 약수가 있었는데 천주교에서 백년 계획으로 성당을 건립하려고 터를 닦을 때 매몰되었다고 한다.

◇ 천진암

- 천진암은 천주교 박해 시절 숨어서 천주교 교리를 강학하던 곳으로 5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이벽, 이승훈, 권철신, 일신 형제와 정약종 묘소가 있다. 이승훈은 우리나라 최초로 세례를 받은 분이시고, 권일신은 순암 안정복의 사위이다.

총 30만 평의 대지위에 성당이 앉은 자리는 5만평으로 48,000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성당의 높이는 85m나 된다. 요한교황 바오르 2세가 1993년 9월 21일 보내온 글도 보았고, 1993년 9월26일 정축했다. 다른 나라는 선교사가 들어가서 천주교를 전파했지만 우리나라는 자생적으로 생겼다고 한다.

미사를 볼 때 신부님이 집전하는 제대는 87톤으로 제천에서 왔고 갈멜수도원에는 십여 명의 수녀들이 있으며 봉쇄 기원으로 한번 들어가면 밖으로 나오지를 않는다. 위로 올라가니 박물관이 ! 翩 중인데 총 1,340평으로, 1~3층 각 450평씩이고, 과거, 현재, 미래관으로 나뉘어져 있다.

기둥은 하나도 없고 5m 철골의 기소를 했으며 100년 계획으로 완공할 거라 한다. 나중에 완공이 되면 다시 와봐야겠다. 비록 종교는 다르지만 조그마한 힘이 모여 대역사를 이루는 것에 찬사를 보내며 경안 생태습지 공원으로 향했다.

◇ 경안천 생태습지

- 1973년 팔당댐이 건설되면서 광주시 일대 농지와 저지대가 물에 잠긴 후 자연적으로 습지로 변해 다양한 철새와 텃새가 서식하는 곳이다. 조류를 관찰할 수 있는 전망대도 설치되어 있고 아이들의 자연학습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습지 내에는 물을 정화 할 수 있는 부들, 창포, 갈대(일명 으악새), 물수세미 등의 수생물이 있고, 물 닭, 쇠물닭, 왜가리, 백로, 청둥오리 등의 새가 한가롭게 놀고 있다. 앞으로 광주의 명소로 거듭 날 것이다.

◇ 무갑산

- 차창 밖으로 보이는 해발 578km에 달하는 든든함과 넉넉함으로 광주를 감싸고 있는 산이 보이는데 임진왜란 때 숨어있던 무사들의 갑옷이 나온 무갑산이다.

산을 뒤로하고 순암 안정복의 이택재로 갔다. 이택재(벗끼리 서로 도와 학문과 수양에 힘쓴다는 뜻)에 가지 안병욱 광주 안씨 종중회장님이 반갑게 맞이하시고 설명도 해주셨다. 초입에는 큰 느티나무가 있는데 호상목으로 국상이 나면 나무 앞에 멍석을 깔고 한양을 향해 울던 나무이다.

이택재는 강학 터로 제자들이 260년 전 세웠으며, 2013년이 탄생 300주년이 되며 비문은 성호 후손 이우성이 찬하고 초대 광주문화원장이신 이훈종박사가 글을 썼다. 선후가 위대한 실학자이신 순암 안정복 선생이 사시던 집이다.

실학이란 백성이 잘 살고 나라가 잘 살기 위해 실사구시를 토대로 경세치용을 주장한 학문이다. 선생은 양반도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그 당시의 지배사상과는 다른 획기적인 주장을 하신 분으로, 1712(숙종 38)년 출생하여 1791! (정조 15)년 졸하니 80세를 살았다. 본관은 광주, 자는 백순, 호는 순암, 한산, 상한 시호는 문숙이다.

오위도총부 부총관 안극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이익령의 딸이고 성호 이익의 문인이다. 숙종 때 외할머니 상을 당하여 전남 영광 월산에서 생활하다 할아버지가 서울에서 벼슬을 하게 되어 남대문 밖 남정동에서 사시다 경종 때 처음 학문을 하시게 된다. 그 뒤 여러 곳을 전전하다 지금의 경안면의 덕곡리에 정착하게 된다.

남인이었기 때문에 당쟁에 희생되어 벼슬도 하지 못하고 집안도 매우 가난하였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하시어 경학, 역사, 천문, 지리, 의약에 능하셨다. 과거에는 단 한 번의 응시도 없었으며, 성호 이익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의 목표를 세웠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을 별로 찾아보지도 못하고 서신으로 많이 주고받았다. 후에 권일신을 사위로 두었으며, 많은 책을 서술하였다. 임관정요, 동사강목, 하학지남 잡동사니 등 많은 책을 쓰셨다. 항상 ‘강목’이 무엇일까 궁금했는데‘강’은 꼭 중요하다가 생각하는 부분을 강의항목에,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목’의 항목에 쓴 것이라고 한다.

본인의 시가 조상 중에! 고려 때 문신인 ‘민지의 편년강목’도 그와 같은가 보다. 비록 정치적으 관(款) 가계는 불행했지만 학문적으로는 매우 높으신 분이었다. 단재 신채호가 순암 선생의 동사강목을 토대로 ‘조선상고사’를 집필했을 때도 동사강목은 매우 잘 쓴 글이라고 극찬한 대목을 보았다. 이택재를 나오면서 이렇게 훌륭한 위인이 내 고장에 사셨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고 그러한 이택재가 아직도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한 사실이 안타깝기도 했다. 앞으로 지정되어 좀 더 관리를 잘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 다음은 용인에 소재한 충렬공 오달재의 묘역으로 갔다. 묘를 올라가는 길은 초라한 할미꽃만 반기고 너무나 쓸쓸했다. 현절사에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어 젊은 나이에 청나라에 끌려간 절의는 높이 추앙받아야 한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가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묘지가 있을까 궁금했다. 오달재의 본관은 해주, 자는 계휘, 호담, 추담으로 윤해의 아들이다. 아버지는 여주 목사를 지낸 분으로 성품이 관대했고 공무집행은 엄격한 규율을 지키며 백성을 사랑하고 농업을 중시하셨다.

그런 아버지의 인품을 이어받아 26살 나이에 사마시에 장원하여 ,전적, 병조 좌랑, 시강원 사서 등 많은 벼슬을 거쳐 부교리가 되었는데 1636년 남한산성에서 청 태종이 척화론자를 잡아 보내라 할 때 29살의 젊은 나이로 자진해서 적진으로 나아가 홍익한, 윤집과 같이 심양으로 끌려갔다. 높은 절개를 꺾기 위해 갖은 회유를 함에도 불고하고 끝내는 1637년 4월 심양성서문 밖에서 처형을 당하셨다.

광주의 현절사, 평택의 포의사우황산의 창렬서원, 영주의 장암서원, 운천서원 등에 모셔져 제향되고 있다. 묘역은 인가 근처에 있었고 대낭장비라 쓰여 있었다. 허리띠 대 주머니 낭이라 해서 선생의 허리띠와 주머니만을 묻은 묘역이었다. 선생은 ‘결혼한 지 두해 밖에 되지 않아 뱃속에 아이가 있어 부인을 약천 남구민의 고모에게 잘 보호해달라는 당부와 내가 고국을 떠나 죽는 것은 확실하나 가장 서러운 것은 사립문 밖에서 내 어머니가 나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고 한다.

비는 김조준이 찬하고 이 상황이 썼다. 나라를 위하여 먼 이국에서 돌아가신 충정에 깊은 조의를 표하며 마지막 코스인 충정공 운계 정뇌경의 사당으로 갔다.

사당에 당도하니 홍살문과 난생 처음 본 홍판이 보였다. 그것은 나라에 충성한 사람에게 임금께서 내리는 것이고 안내도 글귀에는 불천위라는 글이 있었다. 그것은 5대 이상은 사당에 위패를 모시지 않는데 선생은 영원히 모시라는 것이라 했다. 묘역은 후손들이 정성껏 치장을 해서 잘 모셔져 있었다. 정뇌경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선조 임금(1608)때 출생하여 인조 17년(1637)에 돌아가신 분으로 32세의 짧은 생애를 사신 분이다.

◇ 현절사

- 남한산성 현절사에는 삼학사와 김상헌, 정온 선생 등 다섯 분의 위패만 있다. 사학사에 들어도 손색이 없는 분인데 그 분의 충절을 여태까지 몰랐다는 것에 너무 죄송한 생각이 들었다. 병자호란 때 인조를 호종하여 산성에 들어오셔서 독전어사를 하시고 결국은 강화함락과 삼전도에 끌려온 대군과 종친 등의 인질과 산성의 어려운 형편 속에 청 태종이 척화파를 잡아 보내라 할 때 11명의 명단에 들었던 분으로 자청하여 세자시강원 문학으로 가셨다가 은산현의 관노였던 정명수의 갖은 횡포 때문에 정명수를 없애려다 오히려 선생이 청나라 심양에서 돌아가셨다. 남한산성 현절사에 사학사로 모셔 제향을 하고 뒷사람에게 귀감이 되게 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 남한산성 수어장대

- 광주는 경기도의 반을 차지했던 큰 고을로 위대한 분들의 업적을 다시 새겨 먼저 온 사람이 후손에게 길이 남겨줄 수 있는 발자취를 남기고 싶은 마음이다.

[홍민자 객원기자 / 역사문화 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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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기도 광주시 문화관광해설사 - 남한산성 -
글쓴이 : 해설사J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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