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곤지암은 약420년 전에 당파싸움만 일삼던 소용돌이 속에서 우국충정이 투철했던 신립장군의 묘소가 있다.
하지만 패잔장군이라는 것 때문에 관리가 소홀해 오래전에 도굴되기도 했다. 승장인 권율장군의 묘역은 기념관과 사당도 있으며 두 장군의 격은 하늘과 땅 차이다.
얼마 전 가본지 20년도 넘는 탄금대를 다시 찾았다.
쭉 뻗은 중부내륙고속도로를 거쳐 1시간 반 만에 도착했다.
▲ 곤지암에 있는 신립 장군의 묘소 © 홍민자 | |
신립장군은 천혜의 요새인 문경새재에서 적을 무찌르지 않고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칠 수밖에 없었을까? 왜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승자와 살아남은 자는 역사를 향해 변명을 할 수 있다.
하지만 패자는 그런 기회를 박탈당한 채 역사 속으로 추방당한다. 부하였던 김여물 장군이 조령 문경새재에서 왜군을 막자고 했음에도 당시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구조적 모순 때문에 모든 책임을 신립 장군이 짊어지게 됐다.
조선중기의 무신인 신립은(1546~1592)년 47세로 임진왜란이 발발한 해 돌아가셨다.
1567년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 겸하고 북방 여진족 니탕개를 격퇴시켜 6진을 지켜냈으며 임금으로부터 환도와 수은갑투구 하사 받았다.
삼도 순변사가 되어 임금의 보검을 받고 가토 기요마사와 고시니 유키나가와 맞서 부하장병 8,000명과 함께 싸우다가 전세가 완전 불리하자 탄금대에서 푸른 강물로 뛰어내려 장렬히 순절했다. 종사관으로 참전했던 김여물(1548~1592) 장군의 문경새재에서 지키며 전투를 벌여야 한다는 충고를 듣지 않은 점도 결정적인 패전의 원인이다.
북방 경비에 경험이 많고 기병 중심의 조선군의 총지휘관인 신립이 충주에 도착 했을때는 벌써 왜병의 일부는 문경새재를 넘었기에 어쩔 수 없이 달천강이 흐르는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칠 수밖에 없었을 것 같았다.
▲ 남한강 대문산 정상에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 했다는 탄금대, 한창 공사 중이었다. ©홍민자 | |
탄금대의 유래는 악성 우륵이 12줄 가야금을 탄 곳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곳이다. 탄금대는 달천강을 끼고 소나무 숲이 울창한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우륵은 가야금의 명인으로 6세기 중엽에 활동 대가야국 사람으로 가실왕 때 가야금 만들었고 상가야, 하가야 열두 곡을 지었고, 진흥왕 때 신라에 귀화하여 왕의 배려로 국원에서 살며 대내마, 계고, 법지 등에게 가야금, 노래와 춤을 가르쳤다.
나루터에는 제자들을 가르치다 쉬던 곳이라 금휴포라 불리던 곳도 있고, 우륵의 연주소리가 강 건너에서도 들렸다고 청금대라는 지명도 있다.
가야금의 원판은 하늘 상징하고 판의 네모는 땅 가운데 빈곳은 사방과 천지이고 12줄은 1년 열두 달을 상징한다고 한다.
▲ 탄금대 가는 길, 푸른 강물이 흐르고 천길 낭떠러지 옆에는 소나무 숲길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홍민자 | |
또한 열두 대 이야기는 남한강 서북 편 기암절벽이고 바위가 열두 계단에서, 신립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열두 계단을 오르내리며 지휘했다고 하고 낭떠러지 암벽을 수없이 오르내리며 열을 받아 화살을 식히느라고 오르내렸다는 얘기도 있다.
옛날과는 전혀 다르게 탄금대 주변은 공원화 되어 있었고 외국을 다녀와야 애국자가 된다고 새삼 산과 강이 어우러진 강산이 아름다웠고 살기 좋은 나라에 사는 것이 행복했다.
조총을 앞세운 왜군의 침입으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처럼 신립의 처참했던 마음과 우륵이 신선처럼 가야금을 타던 그때를 비교 상상해 보기도 했다. 달천강가 열두 대는 낭떠러지로 까마득히 보이고 그 당시 처참했던 상황도 그려봤다.
옆으로 돌아가니 신립과 8,000병사의 혼을 새긴 탑이 있었는데 탑 상단에 형상화된 혼 불은 탄금대 아래에서 돌아가신 영령들 추모 모습으로 조국을 수호하는 의미이고, 아래조각은 신립과 4인의 군상은 죽음으로 나라를 지켜내려는 충정을 형상화 했고, 또 바위와 바닥부분의 원반은 탄금대를 싸고도는 남한강과 달천의 물결모양이고 탑 부분의 부도는 전투를 생생하게 느끼도록 표현했다.
내가 사는 곤지암은 신립이 탄금대에서 떨어져 순절하고 시체는 못 찾았지만 강가에 살던 어부가 고기잡이 갔다가 낚은 커다란 물고기배에서 장군의 옥관자가 나와 그것을 가마에 태워 지금 묘지가 있는 곳으로 오던 중 이천 기치미고개에서 기침소리가 들려 지명 유래가 됐고, 이천과 광주 경계에서는 아무소리가 나지 않아 넋고개(혼백) 이름도 있다.
하지만 그곳에는 고양이를 닮은 커다란 바위가 있어서 장지로 쓰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다 밤이 저물어 쌍령리에서 머무는데 갑자기 천둥, 벼락이 치며 바위가 곤지암으로 떨어져 곤지암지명이 되었으며 바위는 지금도 곤지암읍에 있다.
▲ 신립 장군과 관련된 곤지암바위와 수령 약 400년 향나무. 바위에 자라는 향나무가 신립 장군의 기개를 보는 것 같다 © 홍민자 | |
탄금대를 돌아다보고 난 후 그 다음은 탑평리에 서있는 중앙탑을 찾았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서라벌과 한양에서 남과 북이 한 날 한시에 떠나 만나는 지점이라 국토의 중앙이라 중앙탑을 세웠다. 신라의 탑 중 유일한 7층으로 통일신라시기에 세워져 “중원탑평리중앙탑”이라고 한다.
탑을 세운 시기는 8c후반~9c초 로 확인되었고 10여개의 크고 긴 지대석 위에 2층 기단을 쌓아 올리고 12.9m에 비해 너비가 좁아 길게 치솟은 느낌이 강하여 웅대함이나 안정감보다 상승감이 높다.
1917년 해체 복원하여 6층에서 고서류 일부, 구리거울 2점, 목제 칠함과 은제 사리함과 기단부에서 청동함 발견, 구리거울은 고려시대의 것이고 여러 번 해체 복원하여 달라진 부분도 있다.
▲ 중앙탑 앞 석등 하대석, 앙련 조각이 아름답다 © 홍민자 | |
▲ 중앙탑이 있는 충주나루에는 중앙공원이 그림처럼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다. © 홍민자 | |
멀리서 바라봐도 탑 자체가 엄청나고 상, 하단에 우주와 탱주가 있고 각 층의 탑 모서리에 우주가 표현되었고 옥개받침은 각 층마다 5층이며 상륜부에는 노반, 복발, 앙화가 있고 노반은 2개가 겹쳐 있어 특이하고 탑 앞에는 석등의 하대석이 있다. 충주는 양질의 철의 3대 생산지이기도 하다. 남한강의 충주나루가 옆에 있고 푸른 중앙공원에 우뚝 솟은 중앙탑 정말 아름답다!
다음 목적지인 중원 고구려비(국보205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가는 중간에 중원 창동 마애불을 안내하는 간판이 보였다. 한번도 본적이 없는 곳이라 가파른 동산을 올랐다. 길의 반대쪽 강변에 동남방향으로 서있는 마애불은 단애의 상단부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모습으로 넉넉하고 큼직하게 새겨진 부처님의 모습이다.
▲ 강가에 중원 창동 마애불 , 앞쪽으로 넘어질듯 기울어진 단애에 새겨진 마애불로 투박하지만 아름다운 모습이다. 밑부분은 바위가 떨어져 없어진 듯 하다. © 홍민자 | |
앞에는 남한강이 흐르는 지점에 위치하여 세상을 향해 풋풋한 미소를 던지고 있었다. 강물위에는 수상스키를 즐기는 청춘 남녀들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더위를 날려 보내고 있었다.
서둘러 중원 고구려비를 향해 갔다. 중원 고구려비는 동네 빨래터에서 아낙네들의 빨래판으로 사용 했던 것을 고 김예식씨의 관심과 단국대 박물관 현장 조사팀의 노력으로 1979년 4월 8일 한반도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비로 최종 확인 장수왕(68)서기 481년 이두식 표기를 사용 비문을 새겼는데 지금은 200여자만 판독 가능 상태이다.
고구려와 신라가 국경 문제로 다투다가 화해하고 쌍방 화친 기념으로 고구려가 형이 되고 신라가 아우 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높이203cm, 비면 높이144cm, 너비55cm 지난 2010년 11월 1일 문화재청의 공식 명칭 변경 예고로 “충주 고구려비”로 바꾸고 예서체와 해서체 사용하였다. 지금은 고구려비의 기념관을 건립하는 지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임진왜란때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칠 수 밖에 없었던 전황과 국방이 허술한 무비유환의 상태와 현장감 없는 탁상공론만 일삼는 조정의 당쟁들이 만든 패전은 어쩔 수 없는 시대상황이 아니었을까?
이 시대에도 국방은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북한은 핵무기로 무장을 한 채 중국과 동맹을 맺고 있고, 우리는 미국과 동맹을 맺고 있지만 그 균형이 깨지면 한반도는 또 다시 전운이 감돌 것임은 자명하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외교와 국방은 나라의 명운을 좌우하므로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
글/경기도 문화관광해설사 홍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