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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의 설경 ⓒ 데일리안 |
나는 민족의 아픔이 서려있는 남한산성에서 문화해설사로 근무하고 있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민족은 불행하다.
한 민족의 역사는 그 민족의 시대적 과제를 일깨워 줄 뿐만 아니라, 미래의 새 시대를 개척 해나갈 불멸(不滅)의 활력소를 제공 해주는 무진장(無盡藏)한 민족의 보고(寶庫)이기 때문이다.
한나라의 번영(繁榮)과 쇠퇴(衰退)의 자취는 그 나라의 역사를 통하여 생생하게 부각되어야 한다. 평화시대에는 그때에 적합한 역사의식을 위기시대에는 거기에 상응하는 역사의식을 가져야 바람직한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
작년 1월 1일부터 남한산성의 관리가 광주시에서 경기도로 이관되고 입장료를 받지 않게 되었다. 김훈의 “남한산성”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보니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남한산성으로 쏠리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가 있다.
그래서 공휴일이면 더 많은 사람들이 남한산성을 찾는다. 더군다나 김문수 경기도지사의 선거공약중에 포함된 것으로 남한산성 역사의 현장을 복원하고자 노력하는 것도 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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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남문의 봄, 지화문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
남한산성은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위치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여러 가지 성의 종류와 크고 작은 성이 1,700개나 되는데 남한산성보다 더 긴 성은 있지만, 온전히 성의 모습이 남아있는 것은 아시아 지역에서 만리장성 다음이라고 볼 수 있다. 밖으로 나가보면 약 380년 전에 어떻게 그렇게 튼튼하고 아름답게 성을 쌓았을까 생각해 본다.
남한산성은 국가사적 57호이고 원성과 치성, 외성을 합쳐 11,76km이다. 하지만 토지공사에서 다시 측정해본 결과 12,355km라고 한다. 남한이라는 개념은 진산과 성산으로 인체에 비유하면 배꼽에 해당하는 아주 귀중한 곳이다.
예부터 한강을 지배하는 나라가 패권을 쥐었다. 처음에는 백제, 다음은 고구려를 이어 신라가 지배했다. 남한산성이 있는 광주는 고려시대에는 관내도, 나중에는 양광도, 경기좌도, 우도로 나뉘고 경기좌도에 속했던 곳(후에 경기도가 됨)으로 2, 3개면에 달하는 아주 큰 고을이어서 다른 지역은 몰라도 광주유수는 정이품벼슬로 지금의 국방부장관 정도의 직급이었다.
이곳은 백제의 역사와 조선의 역사가 함께 숨 쉬고 있는 곳으로 백제 때(B.C 11년 2월)는 7월에 말갈의 침입을 받아 남한산성으로 피난온 후 B.C 6년 7월에 옮겼다고 한다.
또한 통일신라 문무왕 때 쌓은 석축 성으로 밝혀지며 낮이 길다하여 일장성 또는 주장성으로 불렀으며, 성의 주변부가 험준하며 수비하기가 뛰어나고 성의 중심부는 평지로 되어 있어 주거하기 또한 용이하여 산성으로서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었다.
조선 14대임금 선조때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그에 이어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서산대사도 와서 보고 서애 유성룡도 성의 수축을 주장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광해 13년에 경도(제2의 왕도), 보장지로 지정하고 후금의 침입을 막고자 석성을 개축을 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지금의 성의 모습은 이괄(조선 인조 때 반정에 참여한 인물)이 공신 책정에 반감을 품고 난을 일으켰는데 임금은 공산성으로 피난 가고 3일 만에 한양을 점령당하고 만다. 하지만 관군에게 쫓기다 부하에게 목이 베이고 난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은 후금 등으로 도망가 조선 개국이래 최대의 난으로 후금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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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옹성 |
1624년 7월에 총책임자 완풍부원군 이서 장군에게 명하여 동남성은 이회, 서북성은 벽암각성대사를 책임자로 하여 2년 5개월에 걸쳐 1626년 11월에 쌓았다. 성을 쌓은 뒤 청량산으로 바꿔 청이 쳐들어 올 조짐이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성을 쌓고 하남 고을에 있던 광주읍치가 산성으로 옮겨왔으며, 십년 후 겨울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압록강이 얼 때를 기다려 12만 대군을 이끌고 임경업이 있는 백마산성을 돌아 조선을 쳐들어 왔지만, 김자점 등이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방심한 사이 일부대군과 종친들은 강화로 피난가고 길이 막혀 못간 인조임금은 세자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왔다.
인조 임금이 이곳으로 온 것은 동으로 남한산성은 식량이 50일분이 비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에 의해 강화가 함락되어 인질로 삼전도까지 와서 삼배구고 두례하며 청 태종에게 항복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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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비는 삼전도의 지명을 딴 것으로 원래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입니다. 이름 그대로 풀이하면 ´큰나라 청 황제의 공과 덕을 기리는 비´인 셈입니다. ⓒ 데일리안 |
45일간 항전하면서 한명의 청군도 침입을 허용하지 않은 호국 정신이 담겨진 역사적인 성이다. 또한 1895년 일본군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뒤 단발령을 내리고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경기지역 의병들이 일본군에 맞서 대승을 거둔 곳이기도 하다.
성의 시설물은 접문이 4개, 장대가 5개, 옹성이 5개, 치성이 5개, 암문이 16곳, 봉수대 2곳, 군포 3칸짜리가 125곳이 있고 사찰이 9곳이 있었다. 우물 80, 연못 45곳이 있었다.
경기도의 중심지이고 경기도 유형문화재가 1호부터 6호까지 있으며, 그 외에도 문화재자료와 기념물이 5곳이 있으며 2007년 6월 8일 사적 480호로 지정된 행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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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장대 ⓒ 데일리안 |
제1호인 수어장대는 군사적 목적으로 지휘.관측.훈련하는 곳으로 인조가 성을 쌓고 지금서울의 종로 화신백화점자리에 수어청을 두면서 광주에 수어사를 두었다가 이원화 체제의 불편으로 나중에는 없앴다. 후에 영조 27년 무망루를 지으면서 수어장대로 고쳤다.
현재 건물은 1896년 광주유수 박기수가 고쳐지은 것이다.
2호인 숭렬전은 백제의 시조 온조를 모신사당으로 세조10년에 충청도 직산에 있던 것을 임진왜란 때 불타 인조 16년에 옛 도읍지인 산성으로 옮겨 중수하고 정조19년 온조왕 초혼각을 승격시켜 숭렬전이라고 했다. 후에 이서를 배향하고 예조에서 춘.추로 제물이 내려왔다고 하는데, 요즈음은 광주시장이 초헌관이 되어 음력 9월 5일 광주유림이 제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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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원사, 팔도 도총섭이 계시던 곳이다. 승병 또한 순조말까지 500~600명의 승군이 있었던 호국사찰이다. ⓒ 데일리안 |
3호는 청량당으로 남한산성 축성공로자인 벽암 각성대사, 이회장군과 두 부인의 위패가 모셔져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기가 강한 곳으로 소원을 정성껏 빌면 영험이 있다고 한다.
4호는 현절사로 많은 사람들이 절인 줄 알지만 절의를 널리 나타낸다는 뜻으로 병자호란 때 척화파인 삼학사 윤집, 오달재, 홍익한, 청음 김상헌, 정온선상의 위패가 모셔있고 음력 9월 10일 제향한다.
고종서원 철폐 때도 남아있는 사당으로 삼학사는 청태종의 갖은 회유에도 불고하고 불사이군 정신으로 하늘아래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하여 심양성 서문 밖에서 돌아가셨다. 지난해 나는 중국 심양의 삼학사의 발자취를 보러갔지만 중국도 많이 변해서 분간을 못해 못보고 온 것이 너무 아쉬웠다.
결국은 숙종 14년에 세우고 19년에 사액한 후 주전파의 거두인 김상헌과 정온을 다시 추향하였다.
이명한은 청으로 떠나는 김상헌에게 이런 시를 써보냈는데
울며 잡은 소매 떨치고 가지 마소
초원장제(草原長堤)에 해다져 저물었다
객창에 잔등(殘燈) 도도고 앉아보면 알리라. 김상헌은 아래와 같은 답시를 지었다.
가노라 三角山(삼각산)아, 다시 보쟈 漢江水(한강수)야.
古國山川(고국 산천)을 떠나고쟈 하랴마난,
時節(시절)이 하 殊常(수상)니 올동말동하여라.
백제 온조왕 왕궁지로 추정되는 침괘정은 원래는 침와로 창을 베개 베고 잔다는 뜻으로 무기제작소가 있고, 연무관은 군졸을 훈련시켜 한양으로 보내던 곳으로 정조임금은 7박8일을 머무르며 무술시험과 과거시험 보던 곳이 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사적 480호인 남한행궁으로 이제껏 남한산성이 토성인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작년에 토지박물관에서 세계최대의 건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50m에 달하는 주장성터가 발굴됐는데 15kg의 큰 기와가 발굴되더니 19kg의 더 큰 기와가 나왔으며, 기와가 무더기로 발굴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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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에서 출토한 통일신라 기와 명문 ⓒ 데일리안 |
또한 한양에 있는 종묘와 사직의 다른 이름 좌전(종묘)과 우실(사직단)이 전국에서 유일하게 있기도 하다. 좌전은 복원되었지만 우실은 아쉽게도 터만 있어 복원되길 바랄 뿐이다.
그 외에도 많은 시설물(건물이 약 200동 있었다고 함.)과 기념물 등이 있지만 어느 것 하나 귀중하지 않은 곳이 없다. 또한 9개의 사찰은 조선팔도에서 올라온 승군의 숙식소와 무기, 화약제작소로 사용하고 개원사는 팔도 도총섭이 계시던 곳이다. 승병 또한 순조말까지 500~600명의 승군이 있었던 호국사찰이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우리의 역사의 현장을 1905년 일본이 청을 물리치고 조선과 을사조약을 맺은 후 무기.화약이 많다며 수거령을 내릴 때 말을 잘 안 듣자, 1907년 모든 문화재에 불을 질러 순식 간에 사라지고 장경사 일부와 수어장대만 옛 모습으로 남아 있다.
남한산성에 대한 일반인의 생각은 치욕과 패배의 성이라는 것이다. 역사는 이긴 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려때 몽고가 쳐들어 왔을 때도 크게 물리쳤으며 병자호란때에도 한사람의 청군도 들어오지 못했으며 경기지역의병들의 중심지로 대승을 했던 예비 수도였던 곳이다.
1970년대 이후 남한산성을 도립공원으로 바꿔 정비되기 시작하고 1999년에는 경기도는 종합적으로 복원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역사를 체험하고 느낄 수 있도록 각계 각층의 지혜를 모아 우리 후손에게 자랑스럽게 물려줄 문화유산으로 거듭나길 바랄뿐이다.
아 슬프다. 나라 잃은 설움이여! 언제쯤이면 그 옛날의 화려한 영화를 볼 수 있을까? 그날은 진정 언제 쯤일까?
조선의 군대 수어청에서 십팔기무예로 단련된 정예군사들이 철통같이 수호하는 온전한 산성과 건물들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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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정(迎月亭), ´달맞이´ 하는 정자로 소나무 숲속에 있다 . 사진속은 필자 홍민자입니다. ⓒ데일리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