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신문기사
기사
홍미인
2010. 6. 10. 13:52
피의 살육으로 왕권 세운 냉혈한 잠들다 | |||||||||||||||||
<조선왕릉 기행③ 현.인릉> 호위 무사를 두배나 거늘이고 있는 절대권력의 화신이자 지략가 | |||||||||||||||||
2009-08-20 23:34:40 | ![]() ![]() | ||||||||||||||||
조선의 왕릉 42기 중 2기가 북한에 있고 강원도 영월에 있는 장릉을 빼고는 서울과 대부분이 경기도에 몰려있다. 서울 대모산 밑에 있는 헌인릉을 찾았다. 용인-서울간 고속도로가 새로 개통되어 헌인릉은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헌릉은 3대 임금인 태종과 정비 원경왕후 민씨의 능이다. 헌릉에 도착하니 국정원이 바로 옆에 있어 죽어서도 후손이 지켜주는 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좀 늦은 시간이라 헌인릉은 비교적 한적했다. 먼저 맞이하는 능은 인릉이었지만 왕릉은 오르는 것을 허락치 않아서 멀리서 눈으로만 참배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가파르게 조성된 태종의 왕릉 계단을 걸어 오르며 생각나는 것은 왕이 되는 것도 이처럼 어려웠을까? 어쩌면 태종은 계비인 신덕왕후에서 난 세자 방석과 이복동생 방간을 죽이고 형 정종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은 왕이다.
태종(1400~1418, 17년 10개월 재위)은 태조의 정비 신의왕후 한씨에서 태어난 다섯 번째 왕자였다. 태종은 겹겹의 난관과 어려움을 뚫고 마침내 왕이 되었다. 태종은 권력의 화신으로 비쳐졌으며 왕권 강화를 위해서는 개국공신이었던 정도전과 형제들, 네 명의 처남(민무구, 민무질,민무휼, 민무회)도 가차 없이 죽음으로 내몬 피도 눈물도 없는 군왕으로 드라마 ‘용의 눈물’에는 비쳐졌었다. 옛날 같으면 감히 곁에 갈수 없는 갈 수 없었던 태종이 말없이 누워있다. 능상에 오르니 조선의 왕릉 중 석조물이 두 쌍씩 있어 위용이 넘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으며 두 개의 능은 난간석으로 연결했고 지난 장맛비에 능상이 흘러 내려 보기가 흉했다.
아버지를 도와서 조선을 개국할 때 "하여가"로 정몽주를 달랬지만 끝까지 고려에 충성한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격살시킨 장본인이 태종 방원이다. 만수산 드렁칡이 얽힌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년까지 누리리 -이방원의 하여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없고 임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줄이 있으랴 -정몽주의 단심가- 제1차,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동지인 정도전, 남 은, 심효생 등을 제거하고 형제인 방석, 방간을 죽였다. 피 비린내 나는 살육을 하고 얻은 왕권으로 아버지의 길과는 다르게 불교를 탄압하여 사찰의 군대폐지와 11개 종단을 7개의 종단으로 통폐합하여 242개만 남기고 사찰을 없앴으며 공신들이 거느린 사병을 혁파하고 육조직계제를 운영해서 왕권을 강화해서 조선왕조를 튼튼한 반석에 올린 왕이다.
또한 신문고 제도 운영해서 억울한 백성의 사연도 처리하고 왕권강화를 위해 원경왕후 민 씨 이외에 후궁 9명을 들이고 자녀는 12남 17녀를 낳았다. 어찌됐던 태종은 역대 왕 중 가장 용맹하고 야심이 많았으며 지략가였다. 하지만 아버지 태조와의 부자지간의 소원함과 갈등은 예나 지금이나 가슴에 큰 멍에로 남는다. ´함흥차사´의 아픈 역사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신하 박 순은 엄마소와 송아지를 몰고서 원초적 부성을 일깨워서 태상왕으로 신분으로 격상된 아버지의 분노를 삭이려 했던 기억이 났다. 결국 태조의 오랜 친구였던 무학대사가 태조를 달래어 함흥에서 다시 한양으로 모셔왔다.
옆에 나란히 누워있는 원경왕후의 일생은 자식을 여덟이나 낳아서 여염집 같으면 자식 효도 받고 행복했겠지만 군왕의 아내로서는 힘들었을 것이다. 남편의 마음이 셋째 아들에게 간 것을 보며 큰 아들 안평대군의 일탈과 타락, 친정의 몰락 등은 여인으로서 가슴 아팠을 것이고 불세출의 임금 세종을 보며 지하에서 위안을 삼았을 것이다. 태종도 마침내 세자였던 양녕대군을 폐세자시키고 충녕을 세자로 지목하여 2개월만에 전광석화처럼 세종에게 왕위를 넘겼다.
지금으로부터 370여년 전 1636년 병자호란때는 아주 추운 겨울에 청나라가 조선을 쳐들어왔다. 강화로 피난 못간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왔다. 47일을 남한산성에서 피신하며 머무르는 동안 청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흰 눈과 얼음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헌인릉까지 흰색이 하나도 안 보였다는 기록이 있어 가슴 아팠었다. 국방을 소홀히 하여 나라를 침범당하여 피난을 온 군주의 참담한 심경이 어땠을까? 가까이 있는 것이 멀다고 이제야 온 것을 후회하며 인릉으로 향했다. 인릉은 헌릉과 400년의 시차가 있는 곳으로 조선23대 순조와 순원왕후의 능으로 아버지는 정조이고 어머니는 수빈 박 씨이다.
의빈 성씨의 몸에서 난 문효세자가 일찍 죽는 바람에 세자가 됐고 1800년 나라를 개혁을 하던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11살에 순조는 즉위했다. 하지만 숙적인 할머니 정순왕후의 수렴청정과 노론의 노골적인 반대에 뜻을 제대로 펴지도 못했고 세력은 장인 안동 김씨 김조순에게로 돌아갔다. 결국 홍경래의 난이 터졌고 많은 계층이 참여하여 이씨 왕조를 부정했고 진압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려 조선후기 사회 붕괴의 불씨가 되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염병이 퍼져서 많은 백성이 죽었으며 천주교박해, 흉년으로 민심이 불안했던 시기다. 순원왕후는 며느리 조대비가 먼저 손을 쓸까봐 강화도에 살던 원범이를 데려다 왕을 만들기도 하고 평소에 친정아버지를 등에 업고 살 때 보이지 않는 칼을 휘두를 때 남편과의 사이는 어땠을까 상상해본다.
엄청 무서웠던 대선배 할아버지 태종과 자주 어울려 놀기도 할까? 능 주변에는 때죽나무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있다. 원래 파주장릉 인조의 능 곁에 있었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지금의 자리로 천장을 했다. 출입을 통제하여 능상은 올라가 보지는 못했지만 비각건물 공사를 새롭게 하고 있었다. 세계문화유산에 걸맞게 관리.보존해서 우리나라가 옛것을 잘 보존하고 지키는 문화강국이고 뼈대 있는 국민임을 알려지기를 기원해 본다. 아울러 시민들이 쉬는 공간으로서 자연보존이 잘 된 세계유산으로 영원히 남아있기를 염원한다. 또한, 왕릉 답사는 그 당시 시대상과 왕의 통치 스타일과 철학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고 우리 역사문화를 배우는 시간과의 여행이자 살아가는 나침판의 역할이 되는 것 같다. <편집자 주> 정종의 왕릉은 북한땅에 있어 취재를 못해 태종의 헌릉과 순조의 인릉을 다뤘으며 다음에는 세종대왕의 영릉편이 이어진다. | |||||||||||||||||
[홍민자 객원기자 / 역사문화관광 해설사] | |||||||||||||||||
![]() | |||||||||||||||||
이 기사에 대한 소유권 및 저작권은 (주)이비뉴스에 있으며 무단전재, 변형, 무단배포를 금합니다. 이를 어길 경우 법적 조치를 받을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