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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안 기사중
홍미인
2010. 6. 10. 13:47
단종의 비, 동냥으로 살다 외톨이로 묻히다 | |||||||||||||||||||||
<세계문화유산 등재 기념 조선왕릉을 찾아서⑧-사릉> 생이별한 남편 기리다 시누이의 시댁 선산에 겨우 안장 | |||||||||||||||||||||
2009-09-25 22:01:57 | ![]() ![]() | ||||||||||||||||||||
단종 능인 장릉을 다녀 오고난후 단종의 부인이 안장된 사릉은 어떤 모습일까? 사릉은 비공개능이라고는 하지만 답사객은 참배을 할 수가 있다고 한다. 퇴계원에서 내려 10여 분을 가니 한적한 도로 옆에 사릉관리소가 있는데 주변은 한적했다. 능 앞에 전통양묘사업소라는 안내판이 있다.
문화재청 소속 직원의 친절한 안내로 입구에 들어서니 소나무, 느티나무 등 우리나라 전통 건물이나 문화유적지에 심을 나무들을 키우고 있다. 또한 야생화도 단지가 조성되어 있는데 철이 지나서 들꽃들은 많지 않았다. 이곳은 한적한 만큼 조용하게 산책을 하며 왕릉 주변의 나무들과 한국 야생화를 골고루 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야생화 단지를 지나서 왕릉 가까이 다가가니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다. 능과 지척 거리에 개인의 묘와 비석이 보이는 것이었다. 문화재청 직원의 말로는 해주 정씨의 선산으로 12기가 있어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있다고 했다.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의 시댁 해주 정씨의 문중 산이라고 한다. 해주 정씨 가문의 배려로 불쌍한 정순왕후의 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정자각을 돌아 옆으로 가니 예감에 깨진 뚜껑이 있는데 다른 능에는 없는 석물로 문화재로서 가치가 있다고 했다. 정순왕후는 송현수의 딸로 14살에 왕비로 책봉 된 후 단종이 상왕이 되자 의덕왕대비가 되고 단종 복위운동인 병자옥사로 18살 소녀와 17살 소년이 청계천 영도교(영이별을 한 다리)에서 헤어진 후 다시는 못 만난다.
궁궐에서 쫓겨난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에서 초가삼간을 짓고 영월에 있는 남편을 그리워하며 한(恨) 많은 생을 살아간다. 세 명의 시녀와 같이 살며 동냥해온 것으로 끼니를 이어 가는 비참한 삶이었다. 하지만 동네 아낙들이 담 밖에서 먹을 양식과 푸성귀를 던져 놓아 어려운 삶을 이어갔다. 백성들은 동대문 밖에 금남시장을 열어 남자의 출입을 통제 하였고 염색일을 하기도 하였다. 장릉에서 본 영조가 세운 “정업원구기”가 생각났다.
눈물을 흘리며 썼다고 했던가? 능상은 작고 병풍석도 없으며 석물도 크기도 작고 한쌍 밖에 없었다. 하지만 곡장을 둘러보는데 아주 아름다운 문양의 곡장 기와가 시선을 끌었다. 청룡, 주작, 모란, 박쥐 등 예술 작품이었다. 어쩌다 대궐로 들어와 왕후가 되어 남편의 몫까지 살고 7대 임금을 거친 비운의 왕비! 삼촌의 비정한 권력욕에 남편도 잃고 한많은 생을 눈물로 지새웠던 왕비는 민심을 아는 무지렁이 백성들의 사랑은 듬뿍 받은 것 같다.
정순왕후의 능 사릉은 금강송이 울창하게 심어져있어 자식대?소나무들이 정순왕후를 보살펴 주려는 것 같았다. 이제라도 꿈에 그리는 단종임금 옆에 합장을 해 못 다한 정을 나누게 함이 어떨까? [데일리안 경기=홍민자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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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민자 객원기자 / 역사문화관광 해설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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